의료개혁과 의료권력 나남신서 531
조병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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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당시 시민 단체는 의료개혁의 일환으로 의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의사·약사 등이 본연의 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의약분업을 의제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개혁에 대하여, 의사들은 의사의 권위와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는 비상식적이고 위험한 정책으로 판단, 모든 역량을 총화하여 극단적인 파업 및 대대적인 저항으로 맞서, 반쪽자리 의약분업으로 주저앉히는 데 성공한다.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사례로 주정부의 공공의료법을 반대하여 의사들의 파업이 있었으나, 시민들은 의연하게 대처했고, 정부는 외국의 의사들로 대치하는 정책을 구사했으며, 의사들은 곧 현장으로 복귀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에는 미신이나 주술과 별 반 다를 것이 없던 의학이 근대 사회를 맞아 과학과 접목되면서, 사회의 기능주의 사조 속에서 전문화의 길을 걸었다. 즉 의과 대학을 개설하고 전문의 제도 등을 만들어 의료를 전문화하고, 구획하여 다른 이들이 쉽게 진입할 수 없도록 배제하는 전략을 펼치면서, 안으로는 의사들끼리 내부 경쟁을 최소화하고, 밖으로는 타 직종이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굳건한 진입 장벽을 쌓았다.  

   특히 근대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 일탈과 비일탈을 구분하는 데 의사의 판단이 중요해지면서, 의료는 더욱 권력화되었다. 자연스럽게 의료 지식을 독점하고 의료 권력을 행사하는 의사들 앞에서 환자들은 수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탈근대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질환의 구조가 만성 질환으로 바뀌면서 의학의 개입 여지는 축소되었고, 위험 사회가 대두되면서, 시민들의 성찰이 더욱 깊어지자, 의료 소비자로서의 권리, 건강에 대한 주체성 의식이 고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학은 의료 권력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고 교감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안착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는 탈근대화의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의사들은 근대적 의료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과 마주 앉아 의료를 논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주장으로, 의료의 질을 훼손하고 보건의료 전반을 망칠 수 있다고 인식하였고, 이는 처음 의약분업이 의제화 되었을 때, 시민 참여를 제시한 지역의약분업협력위의 시민단체 제시안이, 실제 의약분업 실행에 있어서는 과감하게 삭제된 것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미국의 의사들이 자신들의 직업윤리를 높이고 스스로 의료의 질 제고 및 평가를 강화하는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제로는 시장성을 지향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의사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필요한 의학적 처치만을 담당하고 있다는 명분을 사회적으로 구축한 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데올로기 정립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 의사들의 파업 당시 사회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견인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다소 추상적인 의권을 강조하면서, 의사 사회의 집약된 요구 사항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못한 채 파업을 강행함으로써 명분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즉 참여와 소통이 강조되고 있는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사회가 의사들의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부권적 전문주의에 갇혀 억울함만 호소하는 형국이 되었다.  

   의약분업으로 대표된 의료개혁의 의의는 크지만, 처음의 원대한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이유로, 시민단체의 취약성과 정부의 무능력한 대응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건의료문제가 시민단체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 주장으로 폭넓게 의제화 되지 못하고, 일개 분과나 관심 있는 활동가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는 점, 그래서 어렵게 제 단체의 연대를 이끌어내더라도, 구조적 취약성 때문에 연대의 기초가 쉽게 허물어진 점, 김대중 정부가 국공립의 의사들조차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던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의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데 있어 극복해야할 과제다. 더욱이 환자들이 의사파업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점은 서구 사회와 비교할 때, 우리 국민들도 의료에 대하여는 여전히 근대적 관점에 머무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압축적 성장과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세계적으로는 탈근대화의 사조를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근대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역이 혼재하면서, 보건의료계, 시민사회, 정부 등 각각의 영역에 서 성찰적 자세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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