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구분한 점이 탁월하다.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 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를 온생명이라 할 때, 온생명 안에는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보생명이 포함되며, 현상으로서의 생명은 이 틀을 의미한다는 점, 그리고 주체로서의 생명을 고려할 때, 이미 우리 신체를 이루는 물질 속에는 이미 의지를 포함하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준비가 되어 있어, 결국 나와 물질은 별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의지와 주체를 자각하는 과정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들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인식을 바탕으로, 나라는 주체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 주체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나의 확장이 가능하며, 온생명 사상을 덧입어 결국은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데까지 논리는 확대된다.  

     다만,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하여 온생명 사상을 바탕으로 합의된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개체적 삶과 공동체적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공감할 수 있으나, 생명을 이루는 물질 안에 이미 의지에 관한 주체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을 대입해볼 때, 생의 의지를 확충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면 만들어진 그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는 것, 그것 말고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온전히 생명을 구현할 수 있을런지 의문스럽다. 이념, 목표, 체제 등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생명의 틀 안에 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것들 아닌가.  

   이상을 지향하자는 단순한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물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해볼 때, 저자는 "생명"은 나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우리라는 확장된 틀로서만이 온전히 생명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으로,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내가 되도록 구조화된 생명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생명은 구현될 수 없고 유지될 수 없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러므로  온생명 사상에 대립한 발전, 경쟁 따위의 논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는 용기, 존재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 나와 또 다른 나를 향한 사랑. 결국 인간됨의 회복 또는 인간 본성의 복구만이 생명을 지속적으로 환류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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