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사실과 현실에서 유리되어 신념과 진영 논리에 매몰된 채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성찰하고, 균형감각을 가져야할 것인지, 저자는 치밀한 논리와 사실 해부를 통해 기꺼이 자기 스스로를, 우리들의 나안 시력을 되찾게 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담론 투쟁과 진리 정치의 화두는 중심과 실용을 꺼내는 논객들을 가차 없이 기회주의자,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아붙이며 협소한 구석으로 몰아낸다. 그 온갖 음해를 무릎 쓰고 펜을 힘껏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희망은 충분한 것 같다. 

  이 책의 백미는 리영희 교수, 송두율 교수, 그리고 소설가 김훈의 성과와 여정을 분석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독재 정권의 해체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 자신의 지식을 돌맹이 삼아 철저히 시대의 중심으로 투척하며, 시대 변화를 이끌었지만, 정작 그 지식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라 소망에서 배태된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 극단의 모습에 리영희 교수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 송두율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그의 삶의 여정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다.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을 안으로 분석하고, 그 성과를 그 사회가 설정한 이념에 비추어 검토해야한다는 내재적 접근법을 적용할 때, 북한이 계급 모순과 민족모순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주체 사상을  표방하는 것은 북한사회주의의 독자성을 나타낸다는 송두율 교수 주장의 편협성과 비현실성에 대한 접근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소설가 김훈에 대하여는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하다. 극단의 담론에 편승하기 보다는 사실의 지독스러움과 현실의 냉정함을 바탕으로 겸허한 삶의 정치로의 기로를 열고 있다는 평가는, 생각보다 자연스럽다. 아마 소설가 김훈이 적어도 자신이 쓴 소설의 기치처럼 철저하게 담론과 담쌓기로 일관하고 있는 점이 날선 철학자의 마음을 평온케 한 것 같다.  

  아렌트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을 소개한 대목도 눈에 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함, 그리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라는 무능함, 결국 이 세가지가 희대의 악을 자행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아이히만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지칭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비판을 적용해보면, 과연 나는 얼마나 악에서 비껴서 있는 것일까. 가슴은 순간 뜨끔해진다.  

  저자는 지식인은 지식을 생산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사명자로서 철저히 사실, 합리성, 성찰, 균형 감각을 통해 굳건히 홀로 서야한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극단의 담론이 아니라 삶의 정치에 집중해야함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경험컨데, 삶의 정치는 중심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담론의 힘은 거대하고 사나워서 한번 휩쓸리면 담론의 성결성과 온전함을 입증하는 데 집중하게 될 우려가 있다.  담론에 휩싸인 정책은 면밀한 검토가 필요 없어진다. 담론이 곧 진리이기에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투사해 결국 실패하더라도, 진리에의 목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모순이라고 덮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요즘 회자 중인 무상급식은 어떤가. 초중고 학생들의 급식비가 일률적이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초등학생에게는 충분한 급식비가 고등학생의 경우 쌀을 충당하고 나면 실제로 남는 비용이 적어 식단의 자율성이 편협해질 수 있는데도 따져야할 사실은 철저히 묻혀 있다. 적은 예산으로도 무상급식을 실시할 수 있다거나 또는 다른 중요 교육 문제가 많으니 무상급식은 온당하지 않다는 선동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철저히 따져 봐야한다. 지자체별로 무상급식을 실시할 경우 전체 지자체 예산의 몇 %를 무상급식이 차지하게 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담론에서 벗어나 중심을 찾도록 종용하는 이 책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라면 꼭 읽어야할  필수 지침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극단의 담론을 위한 자기 희생과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사실의 방패와 균형감각의 창을 들고, 현실의 중심에 서서 극단으로 치닫는 담론들을 잡아당길 수 있는 원심력이 공고해져야, 성숙한 시민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무슨 무슨 주의자’란 식의 표현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자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인간의 실체와 사실을 간과하는 낙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도 결국은 인간이다. 이것만큼 자명한 사실도 없다. 지식인의 중심잡기는 고정불변한 현실을 멀찍이 떨어져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냉엄한 사실들 위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사력을 다해 펼쳐야만 하는 치열한 싸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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