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정의의 조건 問 라이브러리 1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정의’란 단어는 때때로 젊은 가슴에 그 무엇보다 뜨겁게 불을 붙인다. 억눌린 젊음이 시리다고 느껴질수록, 정의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존재를 태우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뜨거워진다. 그러나 주저함 없는 혈기와 정의에의 확고한 의지가 손잡을 때, 그 위험성을 스스로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통찰 없는 정의에의 의지 구현이 쓰린 결과로 연결되는 비극을 피해가려면 지혜가 필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정의의 동력이 시혜적이며, 방과자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분노와 복수심에서 시작된다는 통찰이 인상적이다. 로버트 솔몬의 표현대로, 거의 창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불가침성의 느낌, 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침해, 간섭, 모욕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하는 느낌이 훼손될 때 복수심과 분개심이 나오고, 이것들이 정의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경험컨대, 뼛속 깊이 굴욕당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정의에의 동기를 품어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기심을 갖기 마련이며, 이기심이 분노를 잉태하고 복수심을 자라게 하며, 이 순환 속에서 결국은 원한의 체계를 공고히 하게 된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허락된 원한의 분출, 그것을 시행하는 데 있어 ‘정의의 이름으로’란 구호만큼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것은 없을 것 같다. 살펴보면, 이 분노로부터 출발한 정의는 ‘위대한 거부’라고 칭할 수 있는 현실 부정에서부터 출발되나, 이것이 정의에의 동력이 되고 나면, 부정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부정할 대상을 찾고 또 만들어야 하고, 이 부정의 지속이 자아가 되며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은 가슴 깊이 새겨야할 것 같다. 때로는 부정과 분노가 정의에의 추구를 지속하도록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이념으로 지양된 부정은 추상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힘의 도취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셸러를 인용하면서, 정의에의 동기는 사랑의 질서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제안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그것에 고유한 완성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행위의 편향이며 모든 존재는 개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질서의 부분을 이루고, 이 질서는 현재의 가능성을 구현하면서 궁극적으로 유기적 총체를 지향하는 것인데, 모든 것은 자기 나름의 운명 또는 사명을 통해 사랑의 질서의 일부를 이루고 스스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질서를 확인하고 그 완성에 참여한다’는 셸러의 주장은 기독교 정의관과 동일하다. 사랑이 정의의 동력이 되면, 사심 없는 진리에 대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요구하는 자기 희생조차도 자기 존엄성의 바탕 위에서 자기 실현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적극 공감했다.  


   정의의 동기로써 사랑과 부정의 가장 큰 차별점은 시각의 편향성일 듯 싶다. 사랑이 동력이 될 때는 온전한 질서에의 참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므로, 어느 때든 상황 전체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데서 출발하므로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나 생각이 온전하거나 완전한 것인지 부단하게 검열하게 되는데,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심은 지속적으로 씻겨 나간다. 사심이 표백된 동기는 자기 희생과 헌신도 온전한 질서에의 참여케 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부정의 동력 하에서는 원한의 복수가 목적이 되므로 상대가 서 있는 좌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분개와 분노와 원한이 풀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정의이므로 자신의 동기를 검열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잔인한 부정에서 출발한  정의는 나 또는 우리의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아야한다는 가정이 뒷받침될 때만 정의로써 정의가 될 수 있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상해’가 성립될 수 있다.  원한 풀기식 정의는 종국에는 질서와 균형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언제나 온전한 정의를 외칠 수 있다는 가정이 과연 합리적일까. 니체가 주장하는 초인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온전한 정의의 정립이 역사의 발전 방향이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추론할 때, 인간 넘어 온전한 정의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존재, 즉 신이 존재해야한다. 불완전한 인간의 편향성은 부분에의 몰입을 종용할 뿐이다. 부분성을 가지고는 정의를 완성할 수 없다. 거짓 정의를 세우고 정의라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전체를 목도하면서도 개별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속성, 그것을 완전성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것 중 위 조건을 갖춘 것은 사랑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완전을 완성하는 신은 사랑이어야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엉뚱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구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구원의 전제는 사랑일진데,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개인의 구원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사랑을 덧입게 되는 순간 사랑의 질서를 이루기 위한 정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노예화, 착취, 인종차별 등을 철폐한 정치사회 운동은 그리스도 정신에서 나왔으나 이를 추진한 세력은 그리스도 교회의 현실에 실망한 계몽적 지식인과 그 지지자들이었다‘ 옥중서신에서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대목.   저자의 주장과 여러 학자의 정의론을 도합할 때, 사랑을 동력으로 가진 지속된 정의의 확립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추론 때문이었을까. 그리스도인이 사회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까닭,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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