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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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가르치는 경전이라면, 그가 누구든, 가르침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법륜 스님의 추천사가 이 책의 모든 것을 요약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이 책은 목사님이 직접 풀이한 주해서라서 금강경의 내용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장점이 두드러진다. 불자가 아니어서 잘 모르던 용어도 목사님이 공부하면서 익힌 개념으로, 쉽게 풀이하므로 이해가 쉬운 것도 손꼽을 수 있다. 가령 부처님이 여래인 까닭은, 나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며, 오지 않고 가지 않고, 앉지 않고 눕지 앉으며,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하고 깊은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라거나 보살은 깨달은 중생으로 "정"이 있어 망상을 끊지 못한다는 것과 같이 일상에서 제법 많이 들어보았지만, 제대로 모르던 바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중생으로 끊임없이 나고 죽으며, 부처님은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 나지도 죽지도 않는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일체의 습기, 번뇌가 없는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멸도를 하도록 하는데, 멸도는 결국 '나'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로 불리우는 '나'를 '나로 착각하는 것이 아상으로, 아상이 있는 자는 높은 사람은 떠받을면서도 가난한 자나 어리석은 자를 얕보고, 인상이 있는 자는 주와 객을 나누어 스스로 아는 체 하여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고 자랑하며, 중생상은 진실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서도 말과 행동이 다르고 수자상은 깨우침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경계가 드러나면 감정이 일어나 복리를 구하는 것으로, 이 중 하나라도 있으면 중생이고 보살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도 닮았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왜곡된 나로부터 진정한 나로의 각성을 강조하시듯 부처님도 우리가 원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진리라고 단언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보살의 보시와 비교해볼 수 있다. 안으로는 집착을 부수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되 보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 나와 너가 없고, 주고 받는 그것조차 없음이니 주고 받는 바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미 죄인되었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에,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셩경의 교훈과 자연스럽게 대조된다.


일체의 상을 떠나면 곧 부처로, 결국 만물은 '나'의 한 모습이 구현된 것일 뿐이라는 해설이 가슴에 와닿는다. 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을 말씀하신 히브리서를 들어 모든 것들이 확률로서 존재하는 움직임이라는 점에 착안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존재를, 예를 들어 남자, 사람, 생물, 일물로 확장시켜 가면서 품을 넓히라는 인생의 지혜도 의미있는 가르침이다.  


틱낫한 스님을 인용한 부분도 금강경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시야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삶의 두 가지 차원을 기억해야한다는 것, 즉 물결과 같은 삶으로서 역사적 차원과 또 물과 같은 궁극적 차원으로, 우리는 물결을 경험하면서도 물을 경험하는 법을 발견해야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장차 올 나라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우주에서, 실체라고 생각하는 허상을 밟고 서서 가르침을 따라 길을 걸어, 마침내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하 만물이 곧 나임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다시 예수님을 배우고 성경의 진의를 되짚어보도록 하는 귀한 책이다. 

깨달음이란 본디 나에게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없는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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