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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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안에 격변을 겪은 요 몇년 사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진단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주목한 정치철학자가 한나 아렌트라는 소식을 설핏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디서부터 읽어야할지 엄두를 못냈던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마주한 현장에서 아렌트를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통렬한 의지를 갖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 19 팬데믹을 매개로 읽었언 책에서 아렌트의 언급을 보았고, 이진우 교수님이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결하게 요약,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출간했다는 서평을 보자,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결과적으로 매우 옳았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철학적 지평을 10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전체주의가 끝났는가, 무엇이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가,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가 왜 괴물이 아닌가, 왜 완전히 사적인 사람은 자유가 없는가, 왜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가, 정치권력은 꼭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정치는 왜 가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가, 지배 관계를 넘어서는 평등의 정치는 가능한가, 어떻게 정치의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

 

10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아렌트의 저작들을 교차 시켜 해답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렌트의 수많은 저작들이 어떤 좌표에서 쓰여졌는지 가늠하도록 안내하는 동시에,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속살을 진단하면서, 특정한 정권의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전체주의는 이념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예측을 지향한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념 자체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념에 대한 공적인 논의를 허용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현실을 바꿀 힘이 없으므로 논리적 일관성만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세뇌를 가한다는 것이다.

 

또 반복적인 선전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데, 이 선전 자체가 과학성을 근거로 내세우며, 예언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가 하면, 결코 오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단절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행위의 능력마저 파괴된다는 점을 간파한다. 즉 다양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총체적 지배하에 가둔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총체적 지배는 법적 인격을 죽이고, 개인으로서 죽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을 살해하며, 개성을 파괴함으로써 자발성을 박탈하는 단계를 거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브라더에 맞서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를 채택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서의 잔학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전체주의는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다고 진단한다. 대중은 외부의 자극에 쉽게 무너지는데, 계급과 계급의식의 보호막마저 무너지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분노하는 대중으로 변모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수적으로는 거대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원자화되어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기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관찰을 서술한다. 게다가 인간의 자발성이나 예측불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잉여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다원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점도 밝혀낸다. 히틀러가 왜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다수의 집단보다 생각하는 소수의 개인을 주목해서 압제해야한다고 주장했는지, 아렌트는 일종의 주해서처럼 설명해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과 함께 아렌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 공적 영역과 자유에 대한 사유일 것 같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핵심으로 "행위" 가능성을 들고 있는데, 다른 것들은 혼자서도 할 수있는 것이지만, 행위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배태적인 특권이라고 정의한 후, 폴리스를 예로 들어 폴리스야말로 공적 영역이자 자유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론의 영역에서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여야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타인과 내가 공동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원성이야말로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성이 내뿜는 갈등과 경쟁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유는 성립되지 못하며, 다원성은 개인의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발현되는 의견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도 강조한다.

 

아렌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답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탄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 진정으로 정치적인 공론의 장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또 정치적 의견은 다양한 이해와 관점에 따라 형성되므로 순수한 사실을 지향하는 대신 다양한 해석, 논쟁, 논의를 통해 사실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면서 자유와 체제의 이행 과정을 분석한 대목이나, 미학과 정치적 판단을 비교하면서 정치를 위해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가져야할 것은 판단력이라고 분석한 대목도 인상깊다.

 

한 번의 독서로 아렌트의 사상을 완전히 섭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시도라도 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적 공간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 치열하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가 없다면, 전체주의의 공포는 언제 어디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일관된 주장은, 왜 이 시점에, 아렌트에  주목해야하는지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시잘할 미래가 없다면, 무엇인가 시작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완전히 빼앗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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