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의 창조 - 인간다운 삶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마사 누스바움 지음, 한상연 옮김, 이양수 감수.해제 / 돌베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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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나 이론이 주는 가장 매력적인 정점은, 익숙한 시각을 송두리째 잡아 끌어내고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을 재정비하도록 하는, 일종의 벼리 역할을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국가 성장, 잘 살기의 지표로써 발전경제학의  GDP 접근법이 지배하는 현 세계의 정 중앙을 향해 누스바움은 센과 함께 역량접근법을 들고 나와 날카로운 짱돌을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저자는 인도의 바산티를 예로 들어 아무리 1인당 GDP가 늘어도 개인의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한 개인이 정말 잘 사는지, 삶의 질이 높은지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는 1인당 GDP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녀는 역량은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과 같은 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능의 선택 가능한 조합을 의미한다면서, 결합역량과 내적역량을 구분한다. 결합역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기회와 관련되어 있으며, 내적역량은 선천적 능력과는 다른 것으로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이 유효한 까닭은 내적 역량을 기르도록 지지하면서도 내적역량에 맞게 기능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들이 있다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또한 역량접근법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목적으로 보고, 선택과 자유를 중시하며, 가치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바,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해야 역량접근법이 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궁리하면서 핵심역량의 개념도 소개한다. 누스바움은 생명, 신체건강, 신체보전, 감각-상상-사고, 감정, 실천이성, 관계, 인간 이외의 종, 놀이, 환경통제 등을 핵심역량으로 손꼽는다. 핵심역량이 GDP를 대신하여 그 사회, 그 개인이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측정하는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역량접근법은 이러한 핵심역량을 어떻게 최저수준 이상으로 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를 연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역량접근법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GDP 경제학으로는 발전한 국가일지 모르지만, 국민 개개인의 핵심역량 최저수준을 보장하고 있는지 비교한다면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다.

 

저자는 공리주의, 칸트의 철학, 롤스의 정의론, 스토아 학파의 정의론 등과 역량 접근법의 정의를 비교하면서,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기본 입장을 근거로 모든 인간, 즉 어떤 소수자라도 존중받아마땅할 권리를 명징하게 선포한다. 더불어 역량의 이행을 위하여 인권사, 각종 판례를 비교하면서, 정치의 중요성, 특히 헌법과 법률 등 제도적 개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저자가 역량접근법을 현실에 당장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를 잘 포착하면서도 결코 연구를 단념하지 않겠다는 학문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적 맥락이나 문화적 다양성, 국가 정치의 발달 과정 등을 고려하면서 역량접근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탁월하다. 같은 역량접근법을 추구하면서도 센과 다른 학문적 견해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목도 인상깊다.

 

책의 말미에 덧붙인 해제에서도 소개되었듯이 저출산 고령화 등 새로운 모습의 사회가 출현되는 이 때, GDP식 성장론이 우리 사회 현장의 급한 불을 왜 못 끄고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점진적으로 근본 문제의 뿌리에 접근하고 있지 못하는지, 역량접근법은 꽤 근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양적 경제 성장이 아니라 질적 경제 성장이 논의되어야할 시점에서, 명망있는 학자가 나서서 이론의 학계와 실제의 대중을 연계하기 위하여 책을 집필한  시도도 칭찬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이윤 동기가 지배하는 시대, 경제성장에 안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공공정책의 일부이며 단순한 수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국가정책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발전의 목적도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계발하고 동등한 인간 존엄성에 어울리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풍요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해 발전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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