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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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거나 약간 궁금하거나 하면 그 작가의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 작품을 읽어보고 확신이 들면 그 작가는 관심 작가가 된다. 나만의 애정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팬심을 꾸준히 유지하게 만드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의 이름만으로 확신을 가지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약간의 궁금증을 품게 하는 작가 그게 바로 아시자와 요가 될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죄의 여백과 아닌 댄 굴뚝에 연기를 통해서 어떤 작풍의 글을 쓰는 작가인지는 이미 인지해 두었다. 잘 읽혔고 재미도 있었으며 남음이 있는 그런 글이었다. 무언가 찝찝함을 남기지 않은 깔끔함이랄까. 이 작가의 다른 글은 어떨지 궁금했다.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다섯 편의 단편을 통해서 작가는 어떤 상태로든지 고립되어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 버린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끝이 없는 건 무섭지."(35p)



표제작인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에서는 할머니의 유골을 그녀가 살았던 마을로 다시 모시게 하려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자신의 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시 이곳에 유골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내면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게 되면서 무섭도록 급류를 타고 흘러간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목격자는 없었다>에서는 표면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한 남자의 범죄다. 사실 알고 보면 범죄라는 거창한 명목을 붙여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가 발주를 잘못했고 그것으로 영업 실적에서 이익을 내자 취소도 못하고 그러다보니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그런 상황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꽤 코믹한 상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에게 목격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그로 하여금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자신의 알리바이와 어떻게 증명해야만 하는 알리바이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한 여자의 개입은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믿었는데 당신이 배신했잖아." (226p)


<고마워, 할머니>에서는 조금은 더 놀라게 된다. 한 아역배우의 일상. 그녀를 관리하는 것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적극적으로 아이의 활동을 돕는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물론 배우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명목 하에 말이다. 아이는 아무말 없이 따른다. 평범한 아이가 되려면 자신의 엄마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배우의 꿈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는 할머니의 모든 까다로운 조건을 수용한다. 그런 아이가 할머니에게 어떤 행동을 했을까. 서미애 작가의 [잘 자요 엄마]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언니처럼에서>는 하나의 기사로 시작하고 있다. 마지막 엔딩도 역시 기사다. 어디선가 본듯한 기사라고 대충 읽으면 안 된다. 이 두 개의 기사는 전혀 다른 기사이며 결정적인 범죄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앞의 기사를 읽고 그것에 홀려서 이야기를 읽어간다면 내가 속은 그 트릭에 똑같이 빠지게 될 것이다. 



살인의 동기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죠. (252p)

마지막 이야기인 <그림 속의 남자>에서 나오는 트릭은 어느 정도는 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 작가는 남편을 죽였다. 그리고 작품을 그렸다. 그 모든 것에 얽힌 비밀은 무엇일까. 사실 근처까지 갔다고 생각했지만 작가가 숨겨 놓은 트릭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 모든 진상을 알게 되면서 역사라는 소리를 내뱉게 된다. 


아시자와 요. 이 작가 기억해두겠다. 다음에는 또 어떤 식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놀라게 해줄지 아마 앞으로도 작가의 이름이 나왔다면 관심있게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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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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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호러 작가인 미쓰다 신조와 사회파 추리의 대표격인 찬호께이가 한 권의 책으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들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마련이다. 그런 만족감을 충분히 선사할 책이 바로 이 책 [쾌]이다. 딱 한 글자인 쾌라는 단어로는 이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만 젓가락 괴담이라는 부제로 인해서 이 책이 추구하는 방향을 알게 된다. 일본과 홍콩, 중국과 대만의 작가들이 공통으로 하나의 소재인 젓가락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하지만 일반적인 앤솔로지라고 생각하면 뒤쪽으로 갈수록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릴레이 소설인 것이다. 즉 제일 앞에 주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 놓으면 다음 주자는 그 이야기를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면서 그 속에 공통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저젓가락이라고 해서 그냥 아무 젓가락이나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훨씬 더 난이도가 높은 작업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쓰다 신조로 시작해서 찬호께이로 마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다. 젓가락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마다의 특징이 드러나서 그 배경을 유추해 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도 되며 한편으로는 걱정도 든다. 마치 수술할 때 병변을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 헤집어 놓은 환자를 봉합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그런 의사가 된 것인 냥 말이다. 내 걱정은 기우일 뿐 찬호께이 작가는 그런 과정을 말끔하게 수습해 놓았다. 앞에서 설명했던 부분하며 의문점이 남는 부분하며 더불어 자신만의 이야기도 심어 놓는 등 최선을 다해서 아주 말끔히 수술 자국만 남아있을 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런 완벽에 가까운 무봉기술을 펼쳐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혀지는 소설 그것이 바로 이 책 쾌이다.


아시아 쪽 사람이라면 다들 알지 않을까. 밥 위에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똑바로 꽂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에서도 제사상에 올리는 밥은 젓가락을 똑바로 찔러 넣는다. 귀신이 와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젓가락님>이라는 제목을 가진 미쓰다 신조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관습을 이용하고 있다. 매일같이 야생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하루에 한번 밥에 똑바로 꽂는다는 것. 그것을 84일 동안 계속하면 젓가락님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것이다. 그냥 웃고 넘어가 버릴 수도 있지만 여기에 자신만의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시도하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과연 젓가락님께 소원을 빌고 그것이 이루어짐을 받았을까?


이야기는 쉐시쓰의 <산호 뼈>로 이어진다. 신을 받은 산호 젓가락. 그 젓가락을 언제나 몸에 가지고 다니는 한 아이. 그 젓가락으로 인해서 친구가 생겼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오해가 생겼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한편의 추리소설을 보는 듯이 조마조마하게 이어진다. 여기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산호 젓가락의 의미를 몰랐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일까 뒤쪽에서 그 산호 젓가락이 나오고 물고기 무늬의 점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게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그제서야 한 것이다. 


릴레이 소설이라는 것은 반드시 '바통'이 주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서는 젓가락 뿐 아니라 이런 얼룩까지도 바통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서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예터우쯔의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읽고 나서야 말이다. 그렇게 알고 나니 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사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그 이야기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준다. 귀신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주장하며 라이브 방송 중 라면을 먹고 쓰러진 진행자. 그는 알레르기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결국 죽었다. 그가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일까. 라면을 끓여준 동업자이자 여자친구는 졸지에 용의자로 몰리지만 그녀를 범인으로 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정신 차리세요!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알 수 있는 속임수입니다. 세상에 귀신이나 유령, 저주는 없습니다. 당신들 같은 미신 신봉자와 생각을 거부하는 사람만 있을 뿐." (218p)


이런 식의 진행은 범인을 찾아가는 작업만으로도 매우 재미있다. 등장인물은 모조리 다 의심해본다. 그것이 딱 맞아 떨어진 순간 더할 수 없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겠지만 아직은 하수인가 보다. 또 맞추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서는 범인이 드러나고 그렇게 또 샤오상선의 <악어 꿈>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게 한다. 한 여자의 과거 이야기가 중간중간 편집되어 있어서 이 여자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게 된다. 민며느리로 팔려서 다른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 사랑은 이루지 못하고 그 집에서도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같이 분개한다. 



비슷한 의식은 많지만 젓가락님의 특징은 피부에 붉은색 물고기 모양의 흔적이 남는 것입니다. (443p)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이미 산호젓가락과 점에 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는 어떻게 풀려갈 지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며 모든 소재들이 적재적소에 쓰인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것이 바로 릴레이 소설의 강점이구나를 느끼며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찬호께이의 <해시노어>를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앞 부분에 이미 설명을 했기에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거의 7백페이지에 달하는 이 이야기는 단순히 젓가락을 가지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는 점에 더 매력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의 전개가 처음이기에 더 신선하게 느끼게 된다. 여러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그 나라만의 특징을 보여주어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가 된다. 기회가 닿는다면 우리나라 작가들만으로도 이런 식의 릴레이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책이 나온다면 그때는 처음부터 어떤 요소가 바통으로 사용되었는지 정말 집중해서 보리라.


더하기. 598쪽에 [봉신연의] 소설이 언급되서 오래된 친구 만난 냥 반가왔다. 이렇게 내가 읽었던 책이 다른 책에서 언급되는 왜 기쁜 것일까. 나는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그런 우월의식인가 아니면 작가도 나랑 같은 책을 읽었다는 동질감이나 공감대 형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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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타로 한국추리문학선 11
이수아 지음 / 책과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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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라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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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들
에마 스토넥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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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스코틀랜드 앞바다의 등대에서 실제로 등대지기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흔적도 없이. 그들이 생활했던 등대는 문이 안쪽으로 잠긴 채로. 그들이 분명 나온 것은 분명한데 날씨가 좋지 않아 배도 뜨지 않은 날씨였다는데 그들은 없어졌다. 그야말로 미스터리라는 말이 딱 맞는 그런 상황이다. 그 이후로 그들은 다시 발견되지 않았고 이 사건은 '플래넌 섬의 미스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버렸다. 이런 소재가 작가들의 구미를 잡아당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또는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은 미스터리라는 이름으로 통칭해서 부르곤 한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동상들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기계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그 큰 돌을 가져다가 깍아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작은 돌들을 깎아서 붙인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되어 있는 돌이라고 하니 놀라울수  밖에. 거기다 하나도 둘도 아닌 여러 개의 동상들이 줄을 맞추어 군집하고 있으니 더욱 놀랄 밖에. 버뮤다 삼각지대도 그러하다. 그곳에만 가면 사라져버리는 비행기나 배들.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그것은 그냥 우연이나 사고라고 할 뿐 정확한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밝혀내기 어려운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신비스러움이다.



마치 그 등대원들이 처음부터 여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들이 등대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그냥 날아가버린 것처럼. (32p)


어찌보면 이 등대지기들이 사라진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분명히 한 공간에 머물렀었고 닫힌 공간이었고 그곳에 존재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라는 점이 아주 흡사하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서는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었고 한 사람씩 죽임을 당하면서 사라졌고 결국 혼자 남은 사람도 죽음으로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곳은 다르다. 목적이 있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등대라는 곳은 저들의 일터였다. 교대 근무를 하면서 등대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또 한 사람씩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없어져 버렸다. 진짜 무슨 연기가 사라지듯이 그렇게 말이다. 더군다나 배가 가지도 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해를 가할 외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소설 속에서처럼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마지막 사람이 없어진걸까. 그렇다 해도 그들의 시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넘은 사람이다 처리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라는 의문이 또 남게 된다. 그렇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된다.



만약 내가 바다에 지나치게 가까이 가는 날에는, 바다는 나까지도 핥아서 그 바닥으로 삼켜버릴 거예요. 내가 여기 사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377p)


없어진 사람은 그렇다 해도 남은 사람은 어찌할 것인가. 실제로 사라진 사람들의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세 사람의 애인이나 아내들이 나온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야 의기투합해서 남자들을, 등대지기들을 찾으려고 노력도 했겠지만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도 저마다 살 길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도 평생을 바다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 누구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이야기는 그대로 남았디. 등대지기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남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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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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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구성이다. 언제나 사건은 앞쪽에서 터져야 한다. 전반부가 너무 길면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엿가락처럼 늘어진 이야기를 다시 텐션을 붙이려면 그보다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진다. 결국 이런 장르소설에서 텐션은 필수적인 요소이고 그것을 얼마나 유지하게 만드냐가 흡입력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앞부분은 성공적이다. 자신이 매번 하던 루틴대로 행동을 했는데 생각지 못했던 사고가 일어났다.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사고를 당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기에 이건 그야말로 그냥 사고일 뿐이었다. 보험사를 부르고 서로 간에 보상을 해주면 될 일.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도경수는 감금되었다. 


누군가를 어떤 장소에 가둔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아이를 유괴했다 하더라도 그 뒤처리가 복잡해진다. 자칫 아이가 우는 소리라도 났다가는 주위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범행은 금방 들통나버리고 만다. 어른의 경우는 어떨까. 며칠까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실종으로 볼까. 실제로 실종을 신고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하루 이틀은 신고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거기다 범인이 피해자의 핸드폰이나 sns를 통해서 일정 관리를 하고 있다면 더더군다나 실종으로는 신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누가 그를 이곳에 가두어 놓은 것일까. 그것도 친절하게 다친 부위를 치료해 가면서 말이다.


사실 이 첫 챕터를 보는 순간 도경수라는 캐릭터를 의심해본다. 그저 단순히 아무나 감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면에는 복수가 깔려있는 것이 가장 기본일 것이고 그렇다면 과거에 이 도경수라는 사람이 무언가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이 들통나지 않았던 경우라거나 하는 것을 당연히 의심해보게 된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경찰 쪽의 일을 했었더라면, 지금도 하고 있다면 그런 의심은 더 짙어진다.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도경수와 그들을 납치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드러난다. 이때쯤 되면, 이렇게 관계가 드러나 버리면 그 다음에는 한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거기다 과거의 사건이 바탕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들이 범인일 것이라고 의심할 만 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 이야기처럼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 경우에는 그런 의심이 더욱 깊어지는 셈이다. 분명 여기 나온 사람이 범인이다. 


작가는 여기저기 곳곳에 이 범인의 흔적을 던져 놓았다. 맥락을 잘 파악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유추해 낼 수 있지 않았을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던져진 힌트들을 잘 꿰어 맞추다 보면 분명 놓친 점이 보일 것이고 그 놓친 점을 잘 파악해서 아주 뿌리 깊은 곳까지 파헤친다면 이 사람들이 놓친 진범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은 저질러졌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은 진범이 잡혀서 빨리 종결되었고 그 이후엔 복수만이 남았다. 한 점 의혹까지도 말끔해 해소되는 날 이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날 것이다. 분명 무언가 하나는 예상했을지 몰라도 마지막 하나는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작가의 작품은 항상 이렇게 아주 약간은 비극이 남아있다. 배경에 깔려있다. 



항상 궁금했던 게 있었다. 살인자는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147p)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일까 선한 것일까를 두고 철학자들은 자신들만의 논리를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살인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태어나는 인간은 없을테니 말이다. 사회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관계라는 것을 맺고 살다 보니 잘못된 어긋남 인연이라던가 잘못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이 참아서 쌓이거나 해결되지 못할 때 터져 버려서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그것이 범죄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에서의 그 딸아이라던가 서미애 작가의 [잘자요 엄마]에서는 그 딸아이가 그런 피해자들이 아닐까. 물론 그런 환경에 노출되었다고 다 살인자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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