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우선 비(非)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逆)의 몸짓을 가린다. 즉, 그 책 외의 다른 모든 책들, 어떤 다른 세상이었다면,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 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리는 것이다.-26쪽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31쪽
교양을 쌓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 속에 파묻히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신이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컨대,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내지 못한 아나톨 프랑스는 독서 때문에 망친 작가의 전형이요, 우리는 발레리가 그의 글을 인용하거나 그의 작품을 환기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한 이유가, 그랬다가는 그 역시 바로 그런 자기 상실의 과정에 동참하게 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해하게 된다.-49쪽
그렇다면 망각은 풍요화의 또 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몽테뉴가 읽은 것을 서둘러 까먹는 것은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경우 책은 마치 어떤 비개인적인 지혜의 일시적인 수탁물일 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즉 자신의 메시지를 양도한 후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각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해서 모든 문제들, 특히 망각과 결부된 심리적인 문제들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아무것도 기억 속에 고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따르는 고뇌-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주어야 하는 일상의 필요성에 의해 더욱 더 가중된다-가 해소되지도 않는다.-80쪽
이상에서 보듯, 몽테뉴에게 있어 독서는 단순히 기억의 결함하고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독서에서 비롯되는 자아 분열에 따른 광기에 대한 두려움과도 연관되어 있다. 독서는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줌과 동시에 탈(脫)개성화 작용을 발생시킨다. 텍스트의 어떤 내용도 고정시킬 수가 없으므로, 독서는 자기 자신과 합치될 수 없는 어떤 주체를 부단히 야기하기 때문이다.-87쪽
우리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전설들과 각 개인 특유의 환상들로 짜인 이 개인적인 내면의 책은 우리의 독서 욕망 속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책을 구하고 읽는 그 방식 속에 작용한다. 이 내면의 책은 독자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환상적 대상이다. 독자가 생을 통해 만나게 될 최고의 책들이란 단지 책 읽기를 계속하도록 그를 자극하는 이 내면의 책의 불완전한 조각들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작가가 하는 일이란 바로 자기만의 이 내면의 책을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주치는 책들이나 자기 자신이 쓴 책들-아무리 완성도가 높다 할지라도-에 대해서도 언제나 불만족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부단히 추구하고 다가가지만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완벽한-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부합하는- 책에 대한 그러한 이상적 이미지가 없다면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고 또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겠는가?-121쪽
그래서 분신(分身)의 문제가 시냑의 소설에서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놀랍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책이라고 말하는 책을 자신의 책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도솅은 자기 분열 현상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들도 종종 사람들이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할 때, 어떤 '다른 책'에 대해 말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분열은 우리에게 내면의 책이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이 내면의 책은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될 수 없고 어떤 책과도 겹쳐질 수 없다. 우리를 절대적으로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이 내면의 책은 우리 내면에서, 표면상의 모든 동의를 떠나 소통 불가능한 동일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137쪽
우리가 앞에서 열거한 다른 예들과는 역으로 구성된 이 <<사랑의 블랙홀>>은 복합적인 내러티브 장치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책에 대해, 즉 자신들 자체에 대해 상실하는 것 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두 존재를 무대화함으로써 투명성과 충만함에 대한 환상을 제시하고 있다. 타자에게 깊이 각인된 책을 결국 자기 자신의 책이 될 만큼 세세하게 탐구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문화에 대한 진정한 대화의 조건이자 내면의 책들이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조건일 것이다.-147~148쪽
군데군데 유머가 돋보이는 상황들이 펼쳐지긴 하지만, 필이 리타를 유혹하기 위해 취하는 그 방식에는 뭔가 끔찍한 것이 있다. 그것이 언어의 비결정성 부분을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들만 한다는 것, 언제나 정확히 그가 기대하는 존재이고자 한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로서의 그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 앞에 연약하고 불확실한 하나의 주체로 서기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49~150쪽
결국 비평은 작품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 자신의 이상적 형식에 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와일드의 패러독스는 비평을 매체가 없는, 혹은 매체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버리는 자동사적 활동으로 만드는 데 있다. 뭔가를 다르게 말하고자 하는 비평의 대상은 작품-플로베르에게 어느 시골 부르주아라도 상관이 없듯이, 비평가에게는 어떤 작품이라도 상관이 없다-이 아니라 비평가 그 자신이다.-226쪽
비평은 영혼의 목소리요, 비평의 심층 대상은 바로 이 영혼이지 이 탐구의 매체로 쓰이는 일시적인 문학작품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발레리와 마찬가지로 와일드도 문학작품을 하나의 장애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발레리에게 작품은 문학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 문학의 우연적인 한 현상일 뿐이다. 와일드는 주체를 비평 수행의 존재 이유로 여기는데, 작품은 바로 이 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잘 읽는 것이란 작품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한다.-227쪽
독서의 패러독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저 통과만 하고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각의 책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훌륭한 독자, 그런 독자에게 책들에 멈추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바로 그런 '책 가로지르기'를 행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발레리라든가 롤로 마틴스, 혹은 나의 학생들 같은 아주 다양하고 영감에 찬 독자들에게서 살펴본 것도 바로 그런 식의 가로지르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략적으로 알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모르는 어떤 작품의 일부 요소를 파악하여, 나머지 내용에 개의치 않고 자기 고유의 성찰 속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시각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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