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퍼는 자신의 설계방식을 '뺄셈 스타일'이라 부른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며 원하는 걸 자꾸 보태고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적당한 집을 상상하고 거기에서 불필요한 설비나 공간 따위를 가능한 만큼 최대한 제외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뺄셈 설계에 관해 설명하면서 생텍쥐페리의 문장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완벽한 디자인이라는 건 그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제거해야 할 뭔가가 없을 때 비로소 달성되는 법입니다."-29쪽
동서고금을 통틀어 지나치게 큰 집에 대해 뭔가 잘못됐다거나 의문스럽다는 말들을 한 사람은 많지만, 그 어떤 역사 속 위인의 말보다 셰퍼가 툭 내뱉은 이 말이야말로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이다. "너무 큰 집은 집이라기보다 채무자의 감옥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건 우주만큼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을 갖고 관리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다. 평수가 얼마나 됐든 내 집, 나만의 우주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그곳에 광활한 세계가 펼쳐지는 곳, 그런 곳이라면 집의 크기는 중요치 않다.-61~63쪽
집으로 새로이 맞아들인 물건은 그것에게 자신의 소중하고도 제한된 공간을 나눠줄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생활을 함께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은 무엇인가? 대략 이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면 된다. 소유하는 공간 자체를 줄이고 쓸데없는 물건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명심하라. 없으면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최소한의 물건과 진심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 물건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자신의 친구다. 이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의 법칙이다.-66~67쪽
'소유한다'는 것은 곧 필요할 때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세상은 언제라도 거리로 나가면 필요한 서비스는 거의 모든 면에 있어 준비되어 있다. 개인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물건으로서의 의미가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상업 서비스나 공공 서비스에 적당히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주변은 훨씬 더 가벼워질 수가 있다.-69~71쪽
윌리엄스는 스몰하우스에서 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 물건을 거의 사지 않았다. 그녀는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의 수를 정확하게 헤아려 그 수를 '300'에 맞추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있다. 문구류, 옷, 책, 신발, 그릇 등 모두 합쳐 300개까지 제한을 둔다. 하지만 이는 친구들과 노는 마음으로 즐기는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지 강박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녀는 게임의 룰에 따라 티셔츠도 한 장을 사면 한 장은 처분한다고 한다. 그녀에겐 물건의 수를 줄이는 일이 자유를 향한 길이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쓸데없는 물건을 사러 가겠다고 나서지는 않겠지요?"-99쪽
셰퍼는 여러 곳을 거치며 스몰하우스에서 살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때그때 다양한 대답을 해왔는데, 아마도 다음의 '자기중심적'인 대답이야말로 그의 속내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집에 사는 주된 이유가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돈을 절약하겠다는 실천적인 면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나는 그저 큰 집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요."-100쪽
기술과 지식은 틀림없이 진보해왔고, 우리는 지구가 몇억 년 동안 비축한 석유를 물처럼 사용하는 중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아직까지도 쉴 새 없이 죽어라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살아가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 외에 드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증가해왔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란 예컨대 물과 식량이고, 주거와 일용품이며, 정보와 교통 인프라 정비이고, 의료 시스템 확립 정도다. 거기에 모든 것의 근간을 이루는 교육과 연구 등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외의 것'은 뭘까? 대표적인 것으로는 쓸데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들 수 있겠다. 파친코나 슈퍼카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필요 이상의 음식과 제품, 필요 이상의 주거 공간, 필요 이상의 교통 인프라도 그렇다. 의료나 교육에서조차 본래 목적을 초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 '사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29쪽
수요와 공급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이러한 경제는 차라리 '쳇바퀴'라고 표현하는 편이 어울린다. 풍요로워졌다, GDP가 늘었다, 돈이 늘었다고 하면 듣기야 좋겠지만 실제로 증폭하는 건 욕망과 시기심 그리고 지루하고 가혹한 장시간의 노동뿐이다. 쳇바퀴 경제는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욕망이나 시기심에 떠밀린 노동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모든 것을 '경제 효과'니 '소비 향상'이니 하며 좋은 것으로 취급하는 행태가 바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마구잡이 소비를 향상시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소비예찬론이 무조건 이야기의 결말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무엇에 의해 무엇을 목적으로 경제가 돌고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대다.-130~131쪽
보통 사람이 긴 세월 동안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얻어지는 자유를 누리려 할 즈음엔 그의 인생이 만년으로 접어들기 십상이다. 하물며 빚을 내서 물건을 사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로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적은 돈으로 생활해내갈 궁리를 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는 방식은 좀 더 현실성이 있다. 이 '경제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돈 같은 건 많이 필요치 않다. 정작 필요한 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기존 경제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의 짐이 되는 일을 자신의 생활 영역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정신력뿐이다. 하지만 이 '얼씬도 못하게 하는' 일이라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우리는 오락이나 사치 혹은 보통의 생활수준이라 불리는 '부담스러운 짐'을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순간이 와도 그 짐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도 잦다.-138~139쪽
비행선의 곤돌라 안이나 지붕이 딸린 배 위, 호숫가 오두막 같은 공간에서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만을 가지고 들어가 자신의 우주를 만들어 살고 싶다고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런 상상 속에서는 작은 공간이나 얼마 안 되는 물건들과 더불어 활짝 열린 자신의 의식을 인식하면서 내가 이 세상의 주역이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틀림없이 하나의 온전한 존재이고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며 계속 변화하면서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평온함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주친 모든 것에 대해, 나와 마주쳤다는 단지 그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기쁨으로 내 마음은 꽉 채워질 것이다.-149~151쪽
시간이 없다거나 돈이 없다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쳇바퀴 경제의 진짜 죄목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지배하여 돈벌이나 소비에 관한 절대적인 예찬의 윤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시기심에 불타 소비 행동으로 치닫거나,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톱니바퀴가 되거나, 그렇게 하여 손에 넣은 큰 차를 타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런 것이 이 사회의 진짜 문제가 아닐까.-151쪽
어찌 보면 스몰하우스에 들어가는 건 동물로서의 육체보다 인간으로서의 정신 때문이다. 자신의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만의 전용 우주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혼자만의 의식이 팽창하여 우주 전체에 닿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 우주에 마음껏 몰입하여 지낼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공간이 적당히 좁은 것이 좋고, 조종실처럼 몸에 딱 맞는 느낌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쓸데없는 물건, 낯선 물건이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손과 눈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쉽사리 남의 시선을 받거나 타인이 불쑥불쑥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어서도 안 된다. 스몰하우스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폐쇄적인 공간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153~154쪽
우리는 어느 순간 내가 있는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기억과 경험과 상상의 세계,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자유, 그리고 그것들을 묶어 한 인간으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아'라는 존재를 문득 깨닫는다. 동시에 그 자아를 억압하고 사고 형태를 획일화하려는 외부의 압력과, 내적인 세계 따위는 없다는 듯 내 주위에 접근하고 있는 거대한 사회의 존재를 감지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에 항거하듯이 어린이는 종이상자로 아지트를 만들고 어른들은 스몰하우스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폐쇄적인 작은 공간을 통해 얻는 저 신기한 감각은, 보호받고 있다는 동물적인 이유보다도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평소에는 신경 쓰지도 않았던 자신의 의식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스몰하우스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154쪽
다이애나는 '생활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내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가고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이루어내는 업이지요. 또 하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으로 생활을 채우고 그 외의 것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이루어내는 업입니다." (…) 다이애나처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생활방식은 분명 이상적이고 누구나가 동경할 만하다. 반면 현실적인 사회 안에서 생활을 단순하게 하려면 자신을 바깥쪽에서 객관시하고 불필요한 것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노력을 해야만 할 때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166~167쪽
우선 이 세상은 시작부터가 단순하지 않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온갖 물건과 정보, 규칙과 채무, 그리고 인간관계 등에 의해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직관을 믿으라고 하지만 그 역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속에서 단순해지려면 결국 하나하나를 자신에게 묻고 선별하는, 그런 이성적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단순함'이라는 개념에 유독 관심이 가는 때는 주로 자신의 생활이 복잡해지거나 쓸데없는 것이 눈앞을 어지럽게 하는 경우다. 그 '쓸데없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런 자신의 가지와 잎을 일부러라도 자연을 향해 뻗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때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허망함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나마 과거를 놓아버릴 필요도 있다. 과거에 질질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연적인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하고 현재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정리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167~168쪽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더 단순한 삶인지 모르지만, 인류의 그토록 긴 역사 속의 극히 부분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미련하게 춤추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고 사는 게 더 단순할지 모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건 가짜의 삶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말고도 이슬람교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만을 무조건 유일하게 믿으며 인생의 지침을 거기서만 찾아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범주의 지식을 넘어서 내가 보는 세상, 다시 말해 자신의 시야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준별해나가는 과정은 사람의 성장 과정과 병행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집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은 다른 집에서 마치 그곳이 우주의 중심인 양 자란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집을 그렇게 보듯이 그들은 나의 집을 지극히 익명적인 다수의 집 가운데 하나로 본다.-175~176쪽
(이어서) 그렇게 깨달은 것은 이윽고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로, 나라로, 지구로 넓어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 삶에 대한 믿음은 약해진다. 생활을 단순하게 하는 하나의 목적은, 단순히 '생활한다'는 것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세계의 객관적인 모습과 그 세계 안에서 지금이라는 시대와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다시금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단순한 생활'은 이 세계를 단순하다고 믿어버리고서 거만한 얼굴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서 세계를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삶이 아닐까.-17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