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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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저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들은 우수성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전부터 혜택을 준다. 그들은 우리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높은 산의 공기에 익숙해진다. 그들은 낮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던 우리를 단숨에 그들 고유의 분위기로 끌어들인다. 그 고결한 사유의 세계에서 진리는 베일을 벗고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드러내는 듯하다. 우리가 선지자들을 뒤따르며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결국 같은 인류이고 정신 중의 정신인 보편정신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성찰하게 한다. 언제나 예언적인 모든 영감의 원천에는 위고Victor-Marie Hugo의 말처럼 "모든 저자의 저자인 최초이자 최고의 저자, 곧 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말을 내뱉기 위해 그 보편정신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만 한다.-228쪽

그들의 오류는 천박한 오류가 아니라 과잉이다. 그들의 착각에는 시야의 깊이와 예리함이 깃들어 있다. 그들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사람은 분명 멀리까지 갈 수 있고 그들의 큰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진리를 단단히 움켜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용할 수 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들 아래서 사유의 뼈대를 잘 조정하고 단단히 접합하면서 정신을 형성해왔다면, 천재의 오류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를 무분별하게 노출하지 않는다면 그 위험에서 은총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은총으로 새로운 영역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정신이 받은 자극은 그대로 남는다. 우리는 오류에 저항하기 위해 정신을 심화하면서 한층 강해진다. 그런 숭고한 위험을 초래하고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도야하고 더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233쪽

저자들에게서 싸우는 자질이 아니라 진리와 통찰력을 얻으려는 사람은 이렇게 근면하게 수확하고 조정하는 정신, 곧 꿀벌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벌꿀은 여러 종류의 꽃에서 채집한 꿀로 이루어진다. 배제, 요약, 삭제, 편협한 선택의 방법은 정신의 형성에 무한히 해로우며, 그런 방향으로 향하는 정신 안에서 미래에 관해 나쁘게 말하는 결점을 드러낸다. 괴테는 "창조적이지 않은 모든 개인은 취향이 부정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창조적 존재로부터 에너지와 생명을 박탈한다"라고 썼다. 그런 지성은 편협하게 자란다. 보편자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는 대신, 파벌을 만들고 험담이나 하는 정신 수준으로 추락하고 만다.-236~237쪽

우리가 위대한 인물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알게 되면,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서로 동일한 본질적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 나는 그들 모두가 이 진리를 선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그 진리를 놓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거나 추동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지식을 쪼개고 인간 정신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수렴한다. 사원의 기둥들은 각기 별도의 기반 위에 놓여 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기둥들이 지탱하는 아치들은 수렴하며, 많은 쇠시리들에 의해 결합되어 하나의 지붕을 이룬다. 당신의 바람은 그 안전한 지붕을 보는 것이요, 그 아래서 위안을 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악명도, 파벌 간의 충돌도, 논쟁하는 정신도, 지성에 대한 인위적인 자극도 아닌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다.-237~238쪽

설령 진리에 마음을 열고 진리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지라도, 독자는 읽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읽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정신을 형성하기 위해 읽는 것에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사유하기 위해 읽고, 사용하기 위해 재물을 얻고, 살기 위해 먹는다. 나는 언제까지나 읽기만 하는 기계적인 정신활동, 즉 더 이상 진짜 공부가 아닌 지적인 자동성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독자를 비판했다. 그러나 많이 읽는 독자만 수동적인 습관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책은 뜨개질과 같다. 그들의 정신은 일종의 나태에 빠져서 "양치기가 꾸벅꾸벅 졸면서 흐르는 개울을 보듯이" 관념들의 행진을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그럼에도 공부는 생명이고, 생명은 흡수이고, 흡수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양분에 반응하는 것이다. 알맞은 때에 곡물을 수확해 다발로 묶고 빵을 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곡물로 몸을 만드는 것만이 풍성한 수확물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길이다.-239~240쪽

지식의 근원은 책이 아니라 현실과 우리의 사유에 있다. 책은 표지판이다. 표지판보다 먼저 생기는 것은 길이며, 아무도 우리를 위해 진리에 이르는 여행을 대신해줄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는 것이다. 우리 정신의 임무는 반복이 아니라 이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읽는 것을 `붙잡아야` 하고, 몸으로 흡수해야 하며, 결국에는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저자를 본받을 수도, 저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그것을 다시 표현하도록 정신을 재촉해야 한다. 지식의 요지를 우리 자신의 쓸모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적어도 위대한 책에서 얻는 주된 이득은 여기저기 흩어진 진리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함양하는 것이다.-242~243쪽

위대한 정신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에게서 판에 박힌 말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을 얼마나 오용하는 것인가! 그들을 활용해 글을 쓰려 할 때, 그 오용이 얼마나 뻔히 보이겠는가! 그렇게 앵무새처럼 흉내나 낸다면 금세 들통 날 것이고, 머지않아 필자가 보잘것없는 사람임이 드러날 것이다. 창작이야말로 다른 이를 진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넣는다면, 빌려오는 구절이 인용하는 맥락과 동일선상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인용자는 어떤 의미에서 원저자만큼이나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바치는 영광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 경우에 인용구는 사전에서 찾는 단어와 같지만, 정신이 몸을 창조하듯이 인용자는 창조를 하는 것이다. 아퀴나스, 보쉬에, 파스칼이 바로 이렇게 인용했다. 그러니 아주 소박한 과업을 열망하는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와 동일한 정신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243~244쪽

책은 신호, 자극제, 조력자, 기폭제다. 책은 대체물도 아니고 속박하는 사슬도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저자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책은 요람이지 무덤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어린 채로 태어나서 늙은 채로 죽는다. 반면 오랜 세월의 유산을 물려받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으로 "늙은 채로 태어나지만 어린 채로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짜 천재들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둔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종속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저항해야 하고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해방해야 한다. (중략) 다른 이의 사유를 되풀이한다면, 공공연히 하든 은밀히 하든 머지않아 지루하다고 판명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네가 읽은 것만을 말한다면 아무도 너를 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따를 모범은 신의 창조적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 천재들은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는 것은 가엾은 일이다. 우리는 변변찮든 위대하든 이 지구에서 비할 바 없고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정신적 실체이기 때문이다.-246~247쪽

우리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너무 많은 기억은 개인의 사유와 주의력에 해롭다고 말한다. 재료가 너무 많으면 정신은 수렁에 빠진다. 정신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는 정신을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과식은 독이다. 박식한 체하지만 정신은 비뚤어지고 무기력한, 흔히 `살아 있는 도서관`이나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다. 우리는 기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기억을 이용하는 것이다. 계획을 구상하거나 실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영혼이 흡수할 수 있는 것, 목표에 기여하는 것, 영감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공부를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에 새겨라. 나머지는 망각하게 놔두어라. 쓸모없어 보이던 많은 것들-실제로도 대부분 쓸모가 없는-이 간혹 유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만에 하나 필요할지 모르니 기억하자고 말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필요하다면 다시 찾을 것이고, 종이에 쉽게 기록해둘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차든 타야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철도 안내책자를 외우지 마라.-252~253쪽

정신과 기억을 정돈하고 나면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게 되고, 겉보기에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계율이 실은 하나임을 알게 된다. 하나의 조직화된 전체에는 쓸모가 없는 것, 혼란스러운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 전체에 기여하든지 아니면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다. 한 대상이 마치 사람처럼 질서 잡힌 위계-그 대상이 들어갈 자리도 없을뿐더러 완성하거나 기여하지도 못하는-에 침입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짐에서 벗어나 질서가 제대로 잡힌 정신은 모든 힘을 공부에 쏟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신은 목표를 향해 곧장 나아갈 것이고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사소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요 목표일 수 있다.-258쪽

창조적 능력은 대체로 기억의 통제된 활동과 지혜에 의존한다. 어떤 길을 가든 본질적인 것을 확실히 파악하면 전망이 열리고, 새로운 자료를 획득함에 따라 이미 습득한 것은 논리적으로 성장한다. 기존 사유는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모든 진리는 다른 진리의 서광이며, 모든 가능성은 실현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경험에서 이득을 얻을 준비를 마친 내적 질서는 땅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이루는 물질은 활기를 띠고 섬유조직은 성장하면서 양분을 흡수한다. 생명체가 발생하고 번성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환경에 대한 적응인 것과 같다.-259쪽

아퀴나스는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첫째, 기억하려는 것을 정돈하라. 둘째, 기억하려는 것에 깊이 몰두하라. 셋째, 기억하려는 것을 자주 생각하라. 넷째, 기억한 것을 회상할 때는 나머지를 떠올리게 해줄 기억 사슬의 한쪽 끝을 잡아라. 아퀴나스는 키케로의 선례를 따라서 지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과 연결하면 기억에 이롭다고 덧붙인다. 감각적인 것은 지성의 적절한 탐구 대상이고 그 자체로 기억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우연히 간접적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아퀴나스는 말한다.-261쪽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다음 규칙은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가능한 한 자주 숙고하는 것이다. 앞서 기억하려는 것을 깊이 새기라고 권한 이유는 살아가면서 삶의 흔적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이 점점 흐려지더라도 조각 도구로 선을 거듭해서 새기고 산을 충분히 부어 에칭 작업을 하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동기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유용한 사유를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사실을 반추하도록 추동하는 동기다. 동요하는 정신은 이런 작용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데에도 정념이 없는 평온한 삶이 필수다.-263쪽

요약하자면, 기억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의 질이고, 그다음이 기억의 질서이며, 마지막이 기억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사유할 재료가 모자란 경우는 거의 없다. 부족한 것은 재료를 다룰 사유다. 배움에 있어 지적인 흡수, 질서 정연한 연결, 풍요롭고 질서가 잘 잡힌 정신의 점진적인 통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집의 마당이 아니라 구조이고, 무엇보다 그 집에 거주하는 이의 정신이다. 영감을 드높이고 주의력을 날카롭게 유지하라. 진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열정적으로 탐구하라. 그러면 모자람 없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265쪽

우리는 비교적 적게 읽어야 한다. 그보다 훨씬 적게 기억해야 하며, 어차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일종의 외적 기억이자 몽테뉴가 `종이 기억`이라 부른 노트는 읽는 것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노트는 기억보다 넓은 범위를 담을 수 있고, 기억을 보충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도울 수 있다. (중략) 우리는 기억에 지나친 부담을 지워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쓸모없는 관념을 풍족하게 갖는 것보다 정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선호한다. 공책이나 카드 색인은 그런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269~270쪽

절제하는 자세로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 노트하라.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 일시적인 선입견의 효과, 이따금 화려한 문장 때문에 생기는 열광을 피하기 위해 구절을 곧바로 옮겨 적지 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적어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침착하게 수확물의 가치를 판단한 다음, 질 좋은 곡물만을 헛간에 저장하라. 두 경우 모두, 각자의 필요를 의식하면서 정신노동을 활발히 수행한 뒤에 노트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를 완성하는 것, 스스로 정신을 채우는 것, 앞으로 싸울 전투의 조건과 각자의 신체에 맞는 갑옷을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아주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어떤 이론에서 중요할지라도 그 때문에 옮겨 적을 필요는 없다. 고맙게도 책에는 훌륭한 구절이 많다. 그렇다고 국립도서관의 책 전부를 베낄 텐가? 당신은 멋진 코트가 아니라 당신 몸에 맞는 코트를 구입해야 한다. 당신이 골동품 상점에서 보고 감탄한 가구일지라도 그것의 크기와 양식이 당신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거기에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272~273쪽

나는 읽기만 하지 않고 읽으면서 적는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만난 뒤에는 그 사람의 사유를 적기보다 나의 사유를 적는다. 나의 이상은 우리의 공통된 사유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적으면서도 나의 사유를 적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깊이 흡수하는 것, 꿰뚫어보려 애쓰는 것, 단어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쓰는 동시에 쓰는 것을 내 재산의 일부로 저장한다. (중략) 읽으면서 명확한 관념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아야 한다. 당신의 소명과 인성뿐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직접 활용할지도 고려하라. 그렇게 읽는 데에는 일군의 목표가 있다. 그 일군의 목표는, 알찬 곡물은 남기고 나머지는 빠져나가게 거르는 체와 같다. 주의력을 흩뜨리지 마라. 도중에 꾸물거리지도 마라. 당신의 목표와는 다른 저자의 목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목표만을 안중에 두어라. 설령 다소 불쾌하게, 그리고 언제나 경고로 들릴지라도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지금 이 순간에 수행하는 과제에 더 전념할 수 있도록 눈가리개를 써라.-274~275쪽

우리는 특정한 수집열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빽빽한 공책이나 꽉 들어찬 문서보관함을 갖기를 원한다. 그들은 급하게 빈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 넣고, 다른 사람들이 우표나 엽서를 수집하듯이 구절을 모은다. 이것은 개탄스러운 습관이자 일종의 치기이며, 수집광으로 가는 위험한 습관이다. 질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질서가 우리에게 이바지해야지 우리가 질서에 이바지해서는 안 된다. 고집스럽게 수집과 완성에 몰두하는 것은 정신을 생산에서, 심지어 배움에서 멀어지게 하는 길이다. 분류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오히려 노트를 사용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공부의 쓰임에 종속되어야 한다.-279~280쪽

또 모든 메모지에 번호를 매긴 다음, 비슷한 메모지를 묶은 각각의 범주에 번호를 매기고 알아볼 수 있도록, 모서리나 상단에 꼬리표가 달린 메모지나 찾아보기 카드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까지 준비가 되었다면 그 뒤에 따라야 할 절차는 다음과 같다. 책을 읽을 때든 공부에 관해 사유할 때든 침대에 누워 있을 때든 노트를 할 때는 메모지에 적어라. 가까운 곳에 메모지가 없을 때는 더 작은 종이의 한 면에만 적어서 나중에 메모지에 붙여라. 메모지에 적고 나서는, 앞에서 조언한 대로 한동안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을 제자리에 두어라. 신중하게 선택한 분류법은 각자 자신의 공부에 적합한 방법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조언만 해줄 수 있다. 필요하다면 각자 이미 가지고 있거나 앞으로 적어야 할 노트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다시 세분하여 목록을 작성하라.-281~282쪽

상세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참고해서 노트를 적거나 찾았다면, 그 계획의 연속적인 표제에 번호를 매겨라. 그러고 나서 각 표제의 내용에 상응하는 메모지에 번호를 매겨라(나중에 다시 활용해야 한다면 연필로 흐리게 써라). 그런 다음, 같은 번호가 매겨진 메모지를 한 묶음으로 모으고 각각의 작은 묶음에 클립을 끼워라. 그 묶음을 분류하고 나면 각 묶음의 내용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쓰는 일만 남는다. 이와 반대로 정해진 계획 없이 그저 일반적인 지침에 따라 저술을 준비해왔다면, 이제 계획을 짜야만 한다. 계획은 자료 그 자체에서 뽑아내야 하고, 그러려면 먼저 메모지를 전부 꺼내어 하나씩 보면서 각 메모지의 내용을 가능한 한 간략하게 요약해서 종이에 적어라. 그렇게 모든 노트의 내용을 적고나면 활용할 수 있는 관념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관념을 살펴서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거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밝혀라. 주요 관념을 골라낸 다음, 각 관념에 속하는 요점을 정리하라. 혼란스러운 덩어리에서 조금씩 빛이 새어나오고 질서가 나타날 것이다. 그다음에는 간략하게 요약한 것을 당신이 얻은 질서에 맞추어 숫자 순서대로 옮겨 적어라.-283~284쪽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입장과 문제를 뚜렷이 보기 위해, 자신의 사유를 규정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면서 정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주의력을 유지하고 자극하기 위해 써야 한다. 또 쓰다보면 더 조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노력하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 지칠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문체와 글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써야 한다. (중략) 앞에서 글 쓰는 기술은 일찌감치 익히기 시작해 오랫동안 익혀야 하며, 이것이 점차 정신의 습관이 되고 문체를 이룬다고 말했다. 나의 문체, 나의 펜은 나 자신을 표현하고 영원한 진리에 관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도구다. 이 도구는 내 존재의 자질, 내면의 성향, 살아 있는 뇌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진화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문체는 글 쓰는 이가 자신을 형성하는 것에 발맞추어 형성된다. 침묵하는 것은 자신의 인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온전히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큰소리로 사유하는 법, 명시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287~289쪽

문체가 갖추어야 할 특성을 무한정 나열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 세 단어로 그 모든 특성을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진실, 개성, 간결함이다. 단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진실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문체란 사유의 필연성에 상응하는 문체, 대상들과 긴밀히 닿아있는 문체다. 사유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삶의 행위다. 그 표현은 삶의 깨끗한 단면을 나타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일은 우리가 인위성과 인습성, 베르그송이라면 `기성품`이라 불렀을 만한 것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난다. 자기 존재의 일부분만으로 쓰는 것, 자신의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분열을 내버려두는 것은 발화된 말에 대한 모욕이자 인간 본성의 조화로운 통일성에 대한 모욕이다. (중략) 입말이든 글말이든 말의 덕은 자제와 진실성이다. 자제란 내면에서 말하는 진심을 정신이 경청할 수 있도록 인성을 억누르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장황한 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영감이 드러내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다.-290~291쪽

프랑스의 철학자 라슐리에Jules Lachelier는 이렇게 썼다. "진정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창성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고 스스로 독창적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이성에 어울리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들 운명에 따라 특정한 형태를 발견하고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독창성은 진리의 표명이다. 독창성은 독자가 자신의 역량에 따라 받아들일 인상을 약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우리가 금하는 것은 모든 대상을 새롭고 빛나게 하는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진리의 힘에 맞서는 아집이다. 문체의 간결함은 이런 원리들의 결과다. 장식은 사유에 대한 공격이거나 공허함을 숨기기 위한 미봉책이다. 실제 세계에 장식이란 없다. 오직 유기적인 필연성만 있다. 자연에 찬란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찬란함은 그 자체로 유기적이고 마땅히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부구조에 의해 지탱된다.-294~295쪽

문체는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문체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문체를 오용하고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형식에 사로잡히는 사람, 엉터리로 운율을 지어내는 사람, 작가가 아닌 문장가가 되려는 사람이 진리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꼭 필요한 재능을 가진 이는 문체를 완성해야 한다. 완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다. 노련한 대장장이가 철의 달인이 되듯이, 누구나 글쓰기의 달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재미 삼아 금속을 뒤틀어 장식용 곡선을 만드는 대신 창살과 자물쇠, 대문을 만든다. 좋은 문체는 쓸모없는 것을 모조리 배제한다. 문체는 풍요 속의 긴축이다. 문체는 필요한 대목에서는 소비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능숙하게 배열해 절약하며,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진리의 영광을 위해 자원을 아낌없이 쓴다. 문체의 역할은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문체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하며, 그럴 때 문체 자체의 영광이 드러난다.-295~296쪽

앞에서 지성만으로 공부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공부에는 한 사람 전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격정, 허영, 야망, 남을 기쁘게 하려는 헛된 바람의 노예여서는 안 된다. (중략) 공부에 특히 해로운 적은 거의 모든 사람의 인성에 내재하는, 아는 체하고 싶은 욕구다. 아는 체란 진실한 사람이라면 모른다고 인정할 대목에서 안다는 듯이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다. 엉터리 문인, 장광설을 쏟아내는 기자, 무지한 의원은 글의 외투로 지식의 곤궁을 숨긴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하는 필자는 매순간 자만심을 드러내고픈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싶어 한다. 우리는 부족한 자신감을 숨기고, 스스로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큰 사람인 체 한다. 우리는 실은 모르면서도 `단언`하고, `선언`하고, `확신`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제 꾀에 넘어가 스스로를 기만한다.-299~301쪽

대중은 전체적으로 보면 당신을 무너뜨릴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독립이라는 덕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대중의 심성은 초등학생의 심성과 같다. 대부분의 집단에서, 그리고 선거에서 대중은 진실이 아닌 관습을 지지한다. 대중은 아첨 듣기를 좋아하고, 다른 무엇보다 평온함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본질적인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그들에게 단호하게 주장해야 한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고독한 사상가는 이런 적절한 힘을 행사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중략) 진정으로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유일한 힘은 가엾은 인류에게 믿음을 주는 인격과 결합한 강한 신념뿐이다. 당신에게 알랑대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실은 아첨꾼을 경멸하고 주인에게는 굴복한다. 당신이 그런 세계에 속해 있다면, 그들은 같은 세계에 있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호의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조용한 경멸은 당신의 타락을 측정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중략) 그런 세계에서 당신은 여론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며, 인류가 어깨 너머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글을 써야 한다.-303~305쪽

생산적인 일은 다른 덕목들도 요구하며, 그 일의 가치에 비례해 요구 수준이 높아진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덕목을 말할 텐데, 이 덕목들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어서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결과가 나오지 않게 한다. 첫째는 착실하게 작업에 매진하는 꾸준함이고, 둘째는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이며, 셋째는 의지가 약해지지 않게 다잡는 끈기다.-306쪽

간헐적으로 공부하면서 때때로 게으름과 무관심의 주문에 사로잡히는 지성인을 누구나 한 명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여기저기 찢긴 직물과 같다. 그들은 그 직물로 귀중한 의복을 만드는 대신 대충 꿰맨 누더기를 만든다. 반대로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지성인으로 지내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는 것이다. (중략)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공부하는 모습과 휴식을 취한 후 재빨리 과업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리고 이 주기를 꾸준히 반복하는 모습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중략) 우리는 `대충 해도 되는 일`이라거나 `정시에 시작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주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는 자투리 시간-진지하게 공부하기에는 마땅치 않은-이야말로 공부를 준비하거나 정리하고, 참고문헌을 확인하고, 노트를 살펴보고, 문서를 분류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한 시간임을 잊어버린다. 진지하게 공부에 몰두할 시간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자투리 시간은 다른 시간만큼이나 유용한데, 이런 부차적인 일들은 공부에 속하고 또 공부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307~309쪽

고양된 순간에는 이런 유혹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발견하고 저술하는 기쁨이 당신을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겨운 시간은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시간 동안 유혹의 힘은 아주 강하다. 때로는 이 작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진정으로 정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은 누구나, 열중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노력을 수포로 돌리겠다고 위협하는 암울한 순간에 대해 한탄한다. 공부에 대한 염증이 오래 지속될 때, 당신은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계속하느니 차라리 양배추를 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다는 이유로 당신을 밥벌레라고 부르는 노동자가 부러울지도 모른다. 이런 음울한 정신 상태에 있을 때 공부를 포기할 위험이 얼마나 큰가! (중략) 너무 지쳤다면 기운을 되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부를 멈추어라. 피로에서 회복하는 방법을 예로 들면,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몇 페이지 읽기, 무언가를 큰소리로 낭독하기,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써 신체에 변화를 주어 정신을 환기하기, 맑은 공기 속에서 호흡하며 가볍게 움직이기 등이 있다. 그런 다음에는 공부로 돌아가야 한다.-309~311쪽

꾸준함의 또 다른 효과는, 정신은 물론 신체에도 영향을 미치는 가상의 피곤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산보를 시작해 가파른 언덕을 처음 오를 때는 대개 기력이 없고 숨이 가쁠 것이다. 다리까지 아파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 걸으면 관절이 유연해지고 근육이 풀리고 흉곽이 팽창하면서 활동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피로를 느끼더라도 굴복해서는 안 된다. 꾸준히 밀고나가면서 몸속 기운을 끄집어내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조금씩 기운이 돌면서 적응해갈 것이고,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첫 단계를 지나가면 의욕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곤경의 원인이 무엇이든 움츠러들지 말고 극기하면서 겪어내야 한다. (중략) 한 번 수고를 하면 서너 번은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 1분 동안의 용기가 하루를 견딜 힘을 주고, 고된 공부가 기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당신은 이 끈기에 힘입어 평생에 걸쳐 점점 더 쉽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월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말을 타고, 그림을 그리는 솜씨를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월하게 사유하는 솜씨를 익힌다.-312~313쪽

아미엘은 어느 날 일기에서 이렇게 자문했다. "네가 약한 이유가 무엇이냐? 수없이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환경의 노리개가 되었다. 네가 환경을 강하게 만든 것이지, 환경이 너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끈질기게 몰두하고, 중단했던 공부로 완고하게 되돌아감으로써 우리는 꾸준함을 배울 수 있다. 시작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느끼는 피로감이 사라지고, 싫증나는 순간에도 거의 흔들리지 않는 날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성인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이가 변덕스럽다면 그는 아이와 다를 바 없다.-313~314쪽

얼마나 많은 이들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일을 포기하고 추수를 그만두는가! 그렇게 포기한 사람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공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처음 치르는 시험은 참가자를 떨어뜨리는 시험이다. 약한 자들은 한 명씩 떨어져 나가고 용맹한 이들은 견딘다. 결국에는 기드온의 전사 삼백 명과 다윗의 용사 삼십 명만 남는다. 견디는 것은 의지로 해내는 것이다. 견디지 않는 사람은 계획만 세울 뿐 의지로 성취하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놓는 사람은 진짜로 잡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다. 사랑을 그만두는 사람은 결코 사랑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이고, 운명의 일부인 공부는 더더욱 필연적으로 하나다. 참된 지성인은 견디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과업을 떠맡는다. 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진리를 사랑하고, 공부에 자신을 바치며, 조급하게 포기하지 않는다.-318~319쪽

어떤 이들은 약속을 하고, 자신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걸고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까지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이 약속을 지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략)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부류이다. 그들을 닮은 지성인은 자신의 소명을 저버린 사람으로, 사실 지성인이 아니다. (중략) 당신은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말한 대로 행하라. 당신 앞에는 양심의 문제가 있다. 당신의 명예를 걸고 그 문제를 해결하라. 끝맺지 못한 모든 일은 당신의 치욕이다. (중략) 우리는 갈수록 포기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체념한 채 무질서와 왜곡된 양심에 굴복하고, 우물쭈물하는 습관을 들인다. 그 결과 존엄을 잃고 마는데, 그것은 개인의 성장에 조금도 이롭지 않다. 옷감의 치수를 열 번 재되 자를 때는 한 번에 잘라라. 시침질을 정성 들여 하고, 꿰맬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당신이 책임지는 한 그 바느질의 결과는 완벽할 것이다. 완결한다는 것은 끝맺는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완벽하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를 강화한다.-322~323쪽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가늠하고 수행하는 공부는 언제나 훌륭하다. 반면 역량을 넘어서 수행하는 공부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앞에서 당신에게 적합한 공부는 유일무이하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서로 공부를 맞바꾸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주어진 공부는 당신만이 잘할 수 있다. 당신의 친구가 하면 잘할 공부를 당신은 형편없이 할 것이다. 신은 모든 이를 흡족해한다. 자신의 과업과 능력을 조화시키는 것, 알고 있을 때만 말하는 것, 사유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사유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지 않는 것, 대상의 본질을 놓치고는 호언장담으로 안다는 듯이 가장하는 위험을 피하는 것, 이 모두는 위대한 지혜다. 자만은 이 지혜에 반발한다. 그러나 자만은 양심의 적인 것처럼 정신의 적이기도 하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공부하면서 압도당하고, 남들의 비웃음을 사고, 중요한 힘을 소진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믿음까지 저버린다. 그는 불꽃처럼 사그라지고 만다.-328~329쪽

지성의 힘이 인간의 주권에 이바지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 외에 인간 조건의 다양한 측면 또한 고려해야 한다. 앞서 사회에서의 생활과 실천적 활동에 관해 말했다. 여기에 자연과 교감하기, 가정 돌보기, 예술 활동, 사적 모임이나 공적 모임 참여, 짧은 시 읽기, 연설 연습, 지적인 취미, 공개 시위를 더하자. (중략) 오로지 공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를 서투르게 한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고, 자신에게 결함이 될 특수한 성향을 몸에 익힌다. 정신은 늘 열려 있어야 하고, 늘 인류 및 세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번 새롭게 날아오를 역량을 지닌 채 공부로 돌아올 수 있다. 앞에서 "어떤 통이 견과로 가득 차더라도 여전히 그 통에 많은 양의 기름을 부을 수 있네"라는 랍비의 말을 인용했다. (중략) 이제는 견과를 전공 공부로 이해하자. 우리는 전공 공부에, 힘들이지 않는 지적 생활, 고상하게 즐기는 여가, 자연, 예술이라는 기름을 더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긴장을 풀어준다. 이 기름은 전공 공부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334~336쪽

내가 염두에 두는 지성인은 전공 공부를 철저히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보충하는 넓고 다양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의 정신은 일과를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나 똑같다. 그는 신 앞에서나 동료 앞에서나 하녀 앞에서나 한결같다. 그는 관념과 감정의 세계를 책과 논문에만 적어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보이고 삶의 길잡이로 삼는다. 근본에 이르면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다. 정신력은 구획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근면한 탐구의 목표인 `비밀의 정원`과 `포도주 저장고`로 통하는 수많은 문이다. 사유와 활동, 현실과 그 반영은 모두 신의 자식이다. 철학, 예술, 여행, 살림살이, 재정, 시, 테니스는 서로 연합할 수 있으며 화합하지 못할 때만 상충한다. 매 순간 필요한 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과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음악회에서 만물은 하나의 화음을 빚어낸다.-340~341쪽

지성인이 하는 모든 일에 체력을 소진하는 집중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성인의 과업 가운데는 사전작업과 부수적인 작업, 사유와 저술에 수반되는 활동도 있다. 책을 고르는 일, 문서를 정리하는 일, 메모를 모으는 일, 원고를 분류하는 일, 여백에 삽입지를 붙이는 일, 논거를 바로잡는 일, 공부와 책을 정돈하는 일 등은 모두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 자체로 공부는 아니다. 계획을 잘 세우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할 때만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숙고할 가치가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아주 피곤하지는 않은 이런 과업들을 상당수 끝마칠 수 있다. 이렇게 과업을 수행하면서 두뇌가 짊어져야 할 부담에 따라 과업들을 배치하는 계획에는 이중의 장점이 있다. 첫째로 과로를 막을 수 있고, 둘째로 원래 상태를 회복해서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가 휴식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면 휴식 스스로 그 공간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때에 휴식은 주의 산만, 졸음,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불가피한 일의 형태로 드러난다.-345~346쪽

아퀴나스는 정신의 진정한 휴식은 기쁨이자 즐거움을 느끼는 어떤 활동이라고 말한다. 놀이, 허물없는 대화, 교우관계, 가정생활, 즐거운 독서, 자연과의 교감, 이해하기 쉬운 예술 감상, 힘들지 않은 육체노동, 마을 산책, 너무 엄격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연극 관람, 적절한 운동. 이 모두가 휴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역시 과함은 금물이다. 산만한 휴식은 시간을 잡아먹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공부하는 삶의 추진력도 떨어뜨린다. 이 추진력은 최대로 유지하면서 피로는 최소로 줄이는 조화로운 순환을 발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지나치게 오래 공부하면 기진맥진하고, 지나치게 금방 멈추면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오래 쉬면 기존의 추진력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짧게 쉬면 힘을 회복할 수 없다. 당신 자신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공부와 휴식을 배분하라. 이 단서를 달고 말하자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주 짧게 쉬는 편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347쪽

높은 곳을 갈망하고 멀리까지 가기를 바라는 모든 청년에게 나는 인간 본성의 현실 안에 머무르라고 말한다. 적당한 여가를 챙기고, 체력을 소진하지 말고, 평온한 상태에서 정신적 기쁨을 느끼며 공부하고, 자유롭게 지내라. 필요하다면 노력하는 동안 당신 자신을 꾀어서, 나중에 어떤 즐거운 위안을 주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며 에너지를 회복하기 전까지 그 약속만으로도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의 휴식을 배려하라. 아퀴나스는 절대 장난치지 않는 사람, 농담을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뢰한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웃의 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도 온종일 철저히 음울한 사람으로 지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348쪽

공부의 고통과 공부하는 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공부다. 공부는 짜증과 병, 죄와 대적한다. 공부는 인생의 고뇌와 신체의 유약함을 완화하는 높은 곳으로 우리를 끌어올린다. 공부가 고무하는 의지와 공부가 제시하는 에너지의 방향은 걱정을 줄여주는 진통제이자 우리를 끔찍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잡이다. (중략) 공부할 때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안과 침울함에 맞서 어떤 치료제를 써야 하느냐고 자문해보면 답은 오직 하나, 공부다. 공부하다가 낙담했을 때 용기를 얻기 위해 어디에서 자극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공부다. 나의 노력에 적대적인 사람들과 나의 성공을 질시하는 사람들에 저항할 방법은 무엇일까? 공부다. 공부는 치료제이자 위안이다. 공부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게 해준다. 공부의 동반자인 침묵과, 공부의 영감인 기도를 공부에 더하라. 신이 허락한다면 정다운 교우관계 안에서 쉬어라. 그러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350~351쪽

게으름이 괜히 모든 악덕의 어머니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은 낙담과 시련의 어머니이기도 하며, 적어도 그것들에 기여한다. 공부에서 생겨나는 승리감은 그런 우울감과 싸운다.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공부에 힘을 쏟으면 노를 저으면서 노래하는 뱃사공의 기백 같은 것이 생겨나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 진리 또한 우리를 지킨다. 진리는 우리를 안정시키고 강화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는 진리와 사귀면서 우리 자신의 결점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결점에 대해서까지 위로받는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보상이며, 진리를 표명하는 것은 반박당하던 날들에 대한 고결한 복수다.-351~352쪽

비판받을 때 그는 무엇으로 적절히 응수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답은 방금 말한 바와 같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비난과 관련해 지금 내가 아는 답은 딱 하나, 다시 나의 공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퀴나스 역시 공격을 받았을 때 -아퀴나스는 사후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생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비판을 받았다- 자신의 입장을 굳건히 하고 자신의 교리를 규정하고 분명히 밝히려 노력했고, 그런 다음에는 침묵했다고 한다. 그 `시칠리아의 벙어리 소`는 어린이십자군의 몸짓과 함성 때문에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잘못을 바로잡고 침묵을 지키라는 것은 위대한 격언이다. 이 격언을 실천한 사람들은 언제나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자신을 무너뜨리려던 힘을 오히려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추진력으로 삼았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로 집을 지었다.-352~353쪽

자신의 저술을 변호하거나 그 가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것은 유치한 시도다. 가치는 스스로 변호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계가 개입하는 법은 없다. 진리는 존재한다. 참된 저술은 진리의 존재와 힘을 공유한다. 저술 때문에 호들갑을 떨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신에게 해롭다. 침묵하고, 신 앞에서 겸손하고, 당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잘못을 바로잡아라. 그런 뒤에는 세찬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처럼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글 한 편을 변호하느라 시간과 힘을 쏟을 바에야 다른 글을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당신의 평온이 흔하디흔한 성공보다 가치가 높다. 독일의 철학자 카이절링Hermann Keyserling은 이렇게 썼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거나 듣는다. 그는 대상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거나,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353~354쪽

비난이 당신을 향할 때는 털을 곤두세우는 동물처럼 내적이나 외적으로 대항하는 대신, 그 비난의 의미를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관찰하라. 그 비판이 옳고 당신이 틀렸으면 진리에 저항할 작정인가? 설령 그 비판이 적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담대하게 당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나아가 신이 당신의 소명에 부과한 그 적의를 숭고한 목표를 위해 활용하라. 악 자체도 신의 수중에 있고, 심술궂은 비판은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라서 대부분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판에서 이득을 얻었다면, 나머지는 당신을 평가하고 적절한 때가 오면 당신을 공정하게 심판할 신에게 맡겨두어라. 그런 뒤에는 귀를 닫아라.-354쪽

앞에서 지적인 삶은 영웅적 행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영웅적 행위에 아무런 대가도 따르지 않기를 바라는가? 세상사의 가치는 그것에 들인 노력에 정확히 비례한다. 성공은 나중에, 아마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신의 칭찬으로, 그리고 당신의 양심을 자신들의 선지자로 삼을 신의 신하들의 칭찬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신과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 또한 눈에 띄는 결함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을 인정할 것이다. 지성인들도 서로 치사한 짓을 자주 저지르고 때로는 극악한 짓까지 저지른다. 그러나 설령 지성인들이 공공연히 인정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인 등급 분류에 따라 진짜 가치는 매겨지기 마련이다.-355쪽

공부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공부를 경시하는 것과 공부의 아름다움을 지독한 이기주의의 추함으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죄악 가운데 하나다. 고결한 사람들은 영예롭게 살아가면서 열매 맺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부하는 것은 열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 자체를 위해서다. 정연하게 공부하는 그들의 삶은 순결하고 올곧고 용맹하며, 신의 삶과 합일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망해도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소망도 그렇다. 뿌리가 강한 신앙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다가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도, 씨를 뿌렸으나 수확하지 못하더라도, 수영하다가 파도에 떠밀려 계속 해변으로 되돌아오더라도, 걸어가다가 무한한 지평선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 믿고 소망하는 사람은 이런 일들로 실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들은 오히려 행복이다. 공부의 즐거움을 위해, 사랑하는 이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자기 소명의 즐거움을 위해 공부할 때 사랑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356~357쪽

지성인은 금욕을 선택하지만, 내세우며 자랑하게 되는 재산보다 오히려 금욕이 그를 더 풍요롭게 해준다. 그는 세상을 잃지만, 정신으로 세상을 얻는다. 그는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루가의 복음서] 22장 30절). 그에게 현실은 곧 이상이다. 그 이상이 다른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의 흠결을 아름다움으로 감싼다. 정신 안에서 매사에 초연하고 대체로 가난한 지성인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모든 것을 통해 성장한다. 포기했던 것을 은밀한 방식으로 숭고하게 되찾기 때문이다. 그가 내적 활동에 온전히 몰두해 있다면, 누가 봐도 자는 것처럼 보이는 그 상태에서 마음속으로 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359~360쪽

적절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공부에 전심을 다할 때, 탐구를 잘하고 독서를 잘하고 노트를 잘할 때, 소명을 위해 무의식과 밤을 이용할 때, 그럴 때 그가 준비하는 공부는 햇빛 아래 놓인 씨 또는 산모가 괴로워하며 낳는 아기와 같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요한의 복음서] 16장 21절). 공부의 보상은 공부의 결실을 맺는 것이고, 보상은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360쪽

너무나 많은 사람을 허무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노화의 슬픈 효과를 참된 지성인이 모면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평생을 젊게 산다. 누군가는 그가 진리의 영원한 젊음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참된 지성인은 대체로 일찍 성숙하며, 영원이 그를 거두어들일 때까지 상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무르익은 모습을 유지한다. 이런 놀라운 영속적 특성은 성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성神聖과 지성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리는 곧 정신의 신성이다. 진리는 그 신성을 보존한다. 마찬가지로 신성은 삶의 진리이며,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위해 진리를 확고히 다진다. 성장하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덕도 없다. 마찬가지로 성장과 결실, 기쁨이라는 결과를 낳지 못하는 지성도 없다. `알다(savant)`의 어원은 `현명하다`(sage)로, 사유와 행위 모두를 규율하는 `지혜`(sagesse)의 어원과 동일하다.-360~361쪽

모든 사람 안에는 동일한 정신이 있다. 신이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숨 쉬기 때문이다. 얼마나 용기가 있느냐를 빼면 사람마다 다른 것이라곤 뇌 구조-이것을 이루는 요소들은 어느 정도는 자유롭고 활동적이고, 또 어느 정도는 구속받는다-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과 저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많은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빛은 우리가 넓히려 노력하는 틈 사이로 새어나올 수 있다. 일단 나오기만 하면, 빛은 스스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강화한다. (중략) 우리 편에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능력 차이를 줄일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만큼이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참된 지성인은 성과 없음과 쓸모없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무는 씨앗을 품는 나무인 것으로 족하다. 때로는 결실을 늦게 거두겠지만,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거둘 것이다. 정신은 답례를 한다. 일련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설령 우리가 동경하는 높이까지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높이만큼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목표다.-363~364쪽

모든 개인은 유일무이하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의 결실 또한 유일무이하다. 유일무이한 것은 언제나 귀중하고 언제나 필요하다. 우리가 신을 저버리지 않으면 신의 성과는 일정 부분 우리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 성과는 우리의 열등함을 위로해주고, 우리가 무언가를 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과 마주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발산하고, 당신 자신에게 충실하고, 마지막까지 그 충실함을 유지한다면, 분명 당신의 공부-신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공부 그리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신의 영광에 합당한 공부-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많은 이들의 공부와 삶이 당신의 공부와 삶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면서도 나의 공부와 삶이 나에게는 최선이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364~365쪽

지적인 일을 하고 싶은가? 당신 안에 고요한 공간을 만들고, 회상하는 습관을 들이고, 세상의 이해에 초연하고 절제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시작하라. 그러면 공부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인 일을 하는 이에게는 은총이나 다름없는 상태, 곧 욕망과 아집에 시달리지 않는 영혼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렇지 않고는 가치 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리라. (중략) 이러한 조건을 고려한다면, 소명을 받은 사람은 경박함과 무책임함, 공부를 겁내는 마음, 물질적 야망, 자만심과 감각적 욕망, 갈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흔들리는 의지와 인내심, 기꺼이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 적의와 표독스러운 감정, 참된 것에 이르는 길을 막고 참된 것의 승리를 방해하는 기존의 척도를 용인하려는 태도, 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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