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정리정돈을 돕는가 - 정리되지 않는 인생을 위한 철학의 조언
이나 슈미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어크로스 / 2012년 8월
절판


한때는 의미있는 연관관계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 관계가 변하여 질서가 아니게 되어버린 질서들이 있다. '창조적 파괴'는 바로 이럴 때 필요하다. (…) '새로운 것', '다른 것'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인간은 낡은 것,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또 그것이 안전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다음 걸음을 내디디면서 삶이란 오고 감의, 창조와 파괴의 역동적 교체임을 잊을 경우 우리는 어떤 변화도 원치 않게 된다. 이른바 안전을 유지하느라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창조적 파괴'는 괴테가 모든 질서의 마비라고 표현하였던 바로 그것에 대한 반응이다.-31쪽

물리학자 한스-페터 뒤르는 우리 인간의 신체 균형 감각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 강연에서 왜 우리의 다리가 세 개가 아니라 두개인지 물었다. 세 개였으면 균형을 잡기가 훨씬 더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다리가 두 개이기 때문에 비로소 다리 하나를 땅에서 떼었을 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필요가 생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이동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다른 불완전한 체계로 보완함으로써 결국 단점으로 보였던 것과 상당히 안정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60쪽

세계가 질서정연하기에 아무 것도 변화시키고 싶지 않고, 나아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기분에는 코스모스적 질서 관념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65쪽

사물과의 '조화'에 계획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날 오후 내가 배웠던 것은, 그리고 헤르만 헤세가 그 특별한 아침에 깨달았던 것은, 우리의 개입이 전혀 없이 사물들이 서로 만나는 질서, 우리가 사물들을 따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에게도 참여가 허락되는 질서다. 우리는 그런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런 질서는 저절로 탄생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67쪽

<비틀거리면서도 깨달음이 교차하는 순간>-77~83쪽

그는 절친한 친구 모모에게 느릿느릿 지혜가 가득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하는 거야."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94쪽

결국 우리는 카오스와 질서의 왕래 속에,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 애썼다는 그 순환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운 삶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마음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이런 정리정돈을 어떤 기대와 결부시키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쓰레기 더미에서 정리정돈이 잘된 전체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면,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고 어떤 의문부호도 없는 상태를 기대한다면 결국 질서가 아니다. 우리의 관념, 바로 그 질서에 대한 기대로 인해 절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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