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3.11 - 대지진과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를 사유한다 아이아 총서 9
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12년 3월
절판


원전사고는 일어납니다. 지진도 일어납니다.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재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The only one의 사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one of them이라는 사실을 곱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가 한신대지진의 이재민인 나카이 히사오 씨는 only one이라는 자각과 one of them이라는 자각이 균형을 이뤄야 정신이 건강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둘도 없는 하나'인 동시에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57쪽

넓게 보자면 우리는 이재민입니다. 그러나 집을 잃은 도호쿠의 이재민이 보기에 우리는 이재민이 아니겠죠. 말하자면 '후방지원'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도호쿠의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그녀들 그들의 경험을 the only one으로서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이 one of them으로서 많은 참화 가운데 하나이며 여러 사람이 안고 있는 쓰라림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냉정한 시선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 이재민의 the-only-one-ness도 지킬 수 없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조증과 울증을 오가며 우왕좌왕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57쪽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몹시 명쾌하게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고,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명제 자체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했죠. 근거가 있으리라는 근거율 자체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이죠. 여기서 가까스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61쪽

잠시 정리해보죠. 법은 근거이며, 근거는 법입니다. 여기서 순환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순환에서 질서와 제도 혹은 도덕과 법도가 파생되어 나오며, 그로써 우리는 우리일 수 있으며,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기동일성도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타인으로 오해 받아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됩니다.-68쪽

그리하여 지진이란 기초의 동요이며, 근거의 동요이며, 거기서 법, 질서, 신앙이 무너지고 동일성이 붕괴하며, 클라이스트가 놀라운 필치로 묘사했듯이 무근거하여 처참할 만치 잔학하고 비도덕이고 구제할 도리가 없고 모럴이 없고, 거기서 우리를 사정없이 뿌리치는 벌거벗은 현실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근거가 있다는 말은 거짓인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모든 것에는 근거가 있다는 명제 자체에 근거가 없으니까 말이죠. 이 세상에 선이 있고, 도덕이 있고, 근거가 있고, 법이 있고, 이 세상에 신앙이 있다는 건 죄다 거짓말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폭로된 순간, 진정한 부조扶助와 진정한 공동체가 출현했지만, 가공할 학살의 가능성도 등장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클라이스트는 단 30매 정도의 원고로 잘도 써내려갔군요.-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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