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중배씨와 헤어져서 구보씨는 관훈동에 있는 책방 거리로 갔다. 근래에는 사고 싶은 책이 별로 없었다. 다만 나온 김에 버릇이 되어 둘러보는 것인데, 그때마다 역시 이렇다 하게 갖고 싶은 책이 없다는 사실을 다짐하고는 안심 비슷한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책방에서 나와 안국동 로터리 쪽으로 나오다가 구보씨는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아이스케이크를 하나 사서 천천히 먹었다. 아이스케이크의 부피만한 행복이 몸 속에 산뜻하게 퍼지는 것이 알린다.-88쪽
이것도 못난 일이지만 구보씨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무슨 음악 연주 같은 것이어서 악전(樂典)을 모두 익히고 연습곡을 필한 다음에야 자 이제부터 하고 들어가는 그런 것인 줄로 알았다는 데 잘못이 있었다.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것, 연습도 모두 본 연극이라는 사실을 숱한 시간을 낭비한 다음에야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결혼을 너무 크게 생각한 말이 되겠다. 구보씨도 사랑의 연습은 조금은 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홍역 치르듯이 대번에 알아야 할 슬기를 그 속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따진다면 당자가 못한 탓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탓을 하거나 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못났다 치고 결혼이란 것이야 목숨 가진 것들이 다 하는 것인데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이야 무엇이리 한다면 거기는 약간은 역시 이 시대의 탓도 있었던 것이다.-150쪽
악전(樂典)이란 말을 썼거니와 이 시대에 사랑의 악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가짜 악전만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홀로 구보씨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산 모든 사람이 당한 일이기는 하지만, 보통 같으면 악전을 몰라도 콧노래가 나가면 그게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마련인데 구보씨는 한사코 악전 없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는 물구나무선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 역시 구보씨의 잘못으로 인생과 연극을 헷갈린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구보씨에게는 허망한 뉘우침만이 남아 있었고 뉘우침의 모두가 자기 탓은 아니라는 느낌을 짐짓 뭉뚱그려서 가끔 "에익 神哥놈" 하고 내뱉어보는 것이다. 지금 1971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서울에 있는 조선 왕조의 옛 궁전인 경복궁의 삼청동 쪽 담을 끼고 걸어가고 있는 삼십대의 남자인 구보씨는 이런 사람이다.-150쪽
-그러나, 하고 구보씨는 생각하였다. 젊은 허무주의자의 노트를 너무 직업적인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안 된 생각이 든다. 스물 안팎의 그의 눈에 세상이 이렇게만 비쳤다면 그를 탓해야 할 것인가. 더 여유를 주면 그에게 어떤 만족할 만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말을 반박할 무엇을 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더 교활해지라. 더 더러워져라. 너도 손에 피를 묻히고 우리 공범자가 되어라. 그리고 유혹해서 끌어들이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을 살아보아서 배울 슬기란 건 하루를 더 살면 하루만큼 더 공범자라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손이 말짱한 대로 착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구보씨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228쪽
그러나 어떤 사람이 출발점에서 삶에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문제일 뿐이지 옳고 그르고가 없다. 옳고 그르고는 늘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시비 가림이다. 죽은 사람은,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도 한 순간에 헤아릴 길 없는 먼 벼랑에 올라선다. 시인이란 살아 있으면서 노래하는 사람이다. 유언을 남기듯이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젊은이도 그러므로 살아 있다.-229쪽
더 얘기하면 입맛이 떨어질까봐 구보씨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문득 구보씨는 사람이 짐승이나 푸성귀를 먹고 산다는 것이 끔찍스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떤 낱말이 낯설어보이는 경우처럼 자기가 낯설어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었다. 목숨 가진 것이 자기 목숨을 뜯어보는 것은 적당한 데서 그쳐야 할 일이었다. 실험실 속에서 하는 과학이니, 소설이니 하는 소독 장치 없이 평시 삶에서 그런 버릇이 붙으면 살아가기가 까다로워진다. 구보씨는 그러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이쯤에서 그런 생각을 잘라버렸다. 그에서 그치지 않고 구보씨는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의젓이 입에다 넣었다.-251쪽
- 그건 그래요. 나같이 못난 사람이 부처님 가르침을 이처럼 가까이서 받는다는 게 큰 복이지요. - 그렇구 말구요 - 사실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늘 귀에 못이 박히게 길들이는 게 제일인가봅니다 - 속세에 있다보면 그처럼 못이 박힐 계제가 없는 게 탈입니다 - 여기서는 모두 소승보다 뛰어난 분들만 계셔서 그 무리에 싸여 있는 것으로 큰 공붑니다 -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 사실 사람이 옳은 살림을 하는 게 별다른 게 아닌가 봅니다. 옳은 사람을 찾아서 본을 받는 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으뜸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떠나지 못합니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 나 혼자 속세에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 네 - 매일 다니는 이 길을 걷는 게 제일 편합니다. 눈감고도 다닐 수 있으니깐요 - 어려서 들어오셨으니 그러시겠군요 - 부처님이 꼭 여기만 계시지야 않겠지요. 온 세상을 다니면서 중생을 구제하시니 이 세상 어느 곳인들 부처님 발길 닿지 않으시는 데가 있겠습니까? - 그렇지만 부처님은 밤에만은 여기서 주무실 테니 여기가 제일 많이 뵙는 처소가 아니겠습니까? - 네-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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