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처의 블루스 -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주인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9월
품절


그렇다. 소설은 좌절한 의식의 소산이다. 좌절된 욕망이라고 하면 더 정확해지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좀 천박하다. 아무튼 소설가는 좌절한 것이다. 좌절하지 않은 자가 골방에 틀어박혀 담배를 꼬나물고 소설이나 쓰고 있을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은 그걸 좌절이라고 하지 않고 부적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혹은 예술이란 그런 제도의 부적응자들이 부적응의 방식으로 적응하는 또 하나의 제도라고 말이다. 욕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좌절된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성취시키려고 하는 또 하나의 욕망, 그 제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그 부적응의 적응, 혹은 좌절된 욕망을 성취하려는 또 다른 욕망의 제도라는 개념은 썩 내키지 않는다. 그건 결국 세계와 다시 쉽게 화해하려는 철저하지 못한 소설관인 것 같아서이다. 구보씨는 차라리 어떤 소설가가 말했던 좌절한 자의 복수 의식으로서의 소설관에 더 마음이 끌린다. 소설이란 좌절한 의식이 세계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64쪽

아, 그렇다. 진정하고도 완벽한 복수란 그런 것이다. 복수의 대상은 점점 더 커지고 복수의 시기는 점점 더 지연된다. 작은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복수는 진정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소설이란 진정하고도 완벽한 복수와 같다. 햄릿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죽느냐, 쓰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죽는 것도 복수이고 쓰는 것도 복수이다. 진정하고도 완벽한 복수는 그것밖에 없다. 그것만이 세계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복수다. /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구보씨는 절망했다. 정말 소설이란 그런 걸까. 빌어먹을.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진정하고도 완벽한 실패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헤어날 길은 없을까. 교회라도 나가볼까. 빌어먹을. 앓느니 죽지. 그래 아마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야. 그리고 뭐, 꼭 그런 거라고 하더라도 무슨 수가 있겠지. 죽으란 법이 있을라구.-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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