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품절


'젊은 여자들의 무리'는 볼 수 없어도 알제의 아침나절은 거리에 차와 사람이 쏟아져 나와 붐비는 시간. 이 거리 93번지 널찍한 현관에 깡마르고 눈이 조그만 노인이 나와 서 있다가 이내 나를 알아보고 반긴다. 파리의 여느 건물과 그리 다르지 않을 듯한 인상의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니 문에 손으로 쓴 세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세간이 거의 없는 넓고 정갈한 방에 놓인 것은 작은 차탁자를 사이에 두고 1인용 안락의자 둘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전부다. 원래 매우 안락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의자의 쿠션은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그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도처에 스카치테이프를 바른 채 주저앉아 그 위에 몸을 올려놓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노인은 나를 위해서 매우 아껴두었던 커피 믹스를 더운물에 타서 권한다. 필요하면 한 봉지를 더 타서 마셔도 된다고 말하며 초라한 과자봉지를 자꾸만 내 앞으로 밀어주는 그 호의가 그만 가슴을 찡하게 한다.-80쪽

안락의자 옆 벽에는 머리에 검은 히잡을 쓴 여인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 있다. 약간 우울해보이는 그 여인의 찌르는 눈빛이 왠지 가슴을 흔든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여자의 사진이죠." 샤반느 씨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설명한다. 저 사하라의 여인도 샤반느 신부님처럼, 탁자 위에 해골을 올려놓고 창밖으로 찬란한 피렌체의 풍경을 내다보는 피에졸레의 수도사처럼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은 채 사막을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 신부님 셋이 살다가 한 사람은 죽고 지금은 둘뿐이라는 이 휑하고 고요한 아파트에서 사하라 여인의 눈빛은 이들의 고독하고 사색에 잠긴 삶을 요약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실내의 분위기나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얼굴에나 다 같이 공통되게 느껴지는 것은 일체의 불필요한 것들이 완전히 제거된 메마름, 가난, 정결한 고독, 그리고 매우 높고 가벼운 정신…… 그런 것이다. 카뮈가 '사막'이나 '메마른 가슴'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군더더기 없는 정신의 높이와 자유 말이다.-81쪽

"그들이 헐벗은 채 사는 것은 보다 나은 삶을(그 무슨 내세의 삶이 아니라) 위한 것이다. 전라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육체적 자유의 의미를, 손과 꽃들 사이의 일치를, 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대지의 연인 사이와도 같은 공감을 담고 있다." ([사막], [결혼·여름])-82쪽

샤반느 씨는 옆에 있는 침실로 나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조그만 서가를 구경시켜주었다. 작은 책장에 3분의 2도 채 안되게 꽂힌 빈약한 책들이지만 모두가 카뮈의 책, 카뮈에 관한 책들이었다. 한결같이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고 헐어빠진 책들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카뮈의 작품세계와 사귀어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프랑스와 자신의 전 생애가 배어 있는 알제리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마음의 균형을 찾아야 했을 그는 누구보다도 비슷한 입장의 카뮈를 내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 같았다.-87쪽

그러나 막상 독립 회교국 알제리 수도 한복판에 앉아서 오늘의 그가 카뮈를 이야기할 상대를 찾는 것은 지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멀리서 찾아온 내게까지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전화를 걸었던 것이리라. 어둑한 문간에서 작별할 때 샤반느 씨는 내게 그의 저서 두 권을 서명하여 선물해주었다. 열린 문 뒤쪽 창문으로는 맞은편 건물의 베란다에서 담요를 털고 있는 알제리 여인의 미소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꿈처럼 떠 있었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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