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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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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만족스럽기도 하고 약간 아쉽기도 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책이있는마을) - 이재운


ㅁ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건 뭐지? 그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두 단어가 서로 상충되는 거 아닌가? 단어에 대한 유래? 비슷한 것들에게 재미를 느끼던 차에 발견했던 책이었다. 그 시작은 아마 '까만색'과 '검은색'의 뜻풀이 때문이었다. 두 개의 색이 같은 것 같지만 사실 그 뜻이 묘하게 다르다. 예전에 하루를 담는 문장에도 한 번 쓴 적이 있던 바로 그 단어였는데, 그 뒤로 비슷한 단어나, 단어 뜻에 많이 관심가지기 시작했다. 이번 책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일반적인 국어사전과는 조금 다르길 기대했다.

물론 그 기대는 아쉽게도 충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완전 재미없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까만색'과 '검은색'만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재미는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그런 단어들의 뜻은 아니라는 점에 약간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ㅁ 그럼에도 장점을 뽑자면,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단어들의 명확한 뜻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살면서 그걸 얼마나 딱딱 지키며 살 것 같지 않다. 강아지와 개의 차이를 안다고 해서 내가 그걸 구분하면서 쓸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평소에 쓰던대로 단어는 사용하겠지만, 그 속뜻을 아는 만큼 내가 보이는 세계가 커지는 법이니까. 단지 사소한 지식 하나 늘어났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死) : 죽은 직후부터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를 말한다. 이때는 죽은 이를 사자(死者)라고 한다. 일반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망(亡) : 장례를 치른 이후는 망(亡)이라고 한다. 이때는 죽은 이를 망자(亡者)라고 한다. 일반 사람에 쓰는 말이다.

p.59

ㅁ 이처럼 평소에도 쓰는 사망이란 단어가 사실 저런 경계가 나뉘어진 단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어에 속뜻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오 이런 뜻이 있구나...!" 라던가, "아 그래서 이렇게 쓰는구나..." 라고 많이 생각했다. 책 전반에 걸쳐 모든 내용이 위 문장처럼 그 의미를 하나씩 설명해준다.

미묘한 차이의 단어들, 한마디로 유의어에 대한 비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아마 그런 책이었기 때문에, 그저 아쉬운대로 읽었다. 사소한 지식을 조금씩 늘려는 게 나름대로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ㅁ 내용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니라서 마음 먹고 읽으면 아마 하루만에도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양이 적어서, 더 많은 단어를 넣었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나 역시 생각보다 빨리 읽었고, 2일만에 거의 다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읽고 나서 새삼 머리에 남은 게 없었지만...(몇몇 단어는 기억나긴 한다. 고작해야 2개 정도뿐이다.) 마지막 장이었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한자어'의 단어들을 읽을 때 가장 재밌었다. 특히 우리가 자주 쓰고 뻔하게 쓰는 단어들의 한자뜻이 이런 거였다니... 처음 안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단어도 있었지만, 새로운 걸 알게 되어서 나름 재밌게 마무리 지었다.

 기억에 나는 단어라면, 교육(敎育)이 있었다. 

교육(敎育) : 교(敎)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고, 육(育)은 몸을 기르는 것이다.

p.276

 여기서 교(敎)는 가르칠 교를 사용하고, 육(育)은 기를 육을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가르치는 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몸을 기르는 육(育)자를 사용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교육이 이런 뜻이었구나... 한동안 그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지금 교육은 과연 원래 단어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단어 뜻을 보며 조금 심란했다.

 사실 이런 건 한자를 배웠다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순이란 단어처럼 이미 내가 아는 한자로 이뤄진 단어는 그 속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한자를 몰랐기 때문에 이런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신기했다. 모르는 걸 배우는 건 어쨌든 재밌는 일이다. 새삼 깨달았다.


ㅁ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애매한 단어들의 뜻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걸 구분해가면서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씩 궁금할 때가 있기도 하고, 그 애매함 때문에 문득 머뭇거리는 순간이 있긴 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지금 읽은 이 책의 단어 뜻이 언젠가 사용된다면, 나름 그정도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쉬운 건 전적으로 내가 기대한 게 아니라는 이유였지만, 책 자체로는 재미가 없진 않다. 다만 양이 적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아쉬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거 시리즈였다. 은어사전부터 심지어 궁중어사전도 있었다니... 충격) 흠... 과연 이걸 다시 읽을진 잘 모르겠다. 한 번 보지만 다시 볼만한 책인가? 라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니까. 요즘은 이런 걸 모두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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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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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를 ‘4월의 물고기’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4월의 물고기(자음과 모음) - 권지예

ㅁ [4월의 물고기]라는 책을 언제 처음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4월이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책에 쓰여진 4월에 서점에서 봤었으니까. 그 순간이 무척 우연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서목록에 써뒀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서점에 들렸을 때, 다시 이 책을 발견했다. 마땅히 책을 사고 싶지 않았던 날이었는데, 2번이나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건 또 하나의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덥석 구매해서 읽었다. 4월의 책이 결국은 8월에 읽혀진 건 이도저도 아닌 단지 ‘충동’적이고 우연인 셈이다. 

ㅁ 책을 펼치기 전에 표지를 보다가 ‘장편소설’이란 말에 꽂혔다.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사실 [피프티 피플]도 장편소설이긴 한데, 내용이 약간 연작소설에 가까워서 장편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4월에 읽은 [점선의 영역] 이후로 읽는 장편소설인 셈이다. (그럼에도 점선의 영역은 책이 얇은 편이었다.) 약 400쪽 짜리 장편소설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자꾸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어도 한동안 자꾸 단편소설집이나 연작소설을 읽으니, 매번 딱 한 이야기가 끝날 때 책을 덮곤 했었다. 원래 난 중간에 이야기가 끊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는데, 장편은 그게 잘 안된다. 아예 어디선가 끊긴 해야하니까 보통 한 단락이 끝나는 순간에 그만둔다. 그 다음 장을 다 읽지 못한다면 시간이 남더라도 그냥 덮어두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날잡고 통째로 읽어버리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이건 내가 힘들다. 독서도 은근 지치는 일이라는 걸 그 때마다 느끼니까.
 어쨌든 [4월의 물고기]는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전반부만 제외하고 약 250페이지는 하루만에 다 읽었다. 그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어느 순간에 자르고 책을 덮는게 불가능했다. 순간순간이 너무 몰입했다. 책 뒷표지에 적힌 말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었다.
… 소설의 중반부에 도달하기까지는 그 어떤 섣부른 예측도 하지 말기 바란다. 기괴하기까지 한 콜라주 같은 이 이야기는 낮의 또 다른 밤 이야기이며 밤의 또 다른 낮 이야기이다. … (중략) … 한번 잡은 책은 쉽게 놓을 수 없었고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 하성란(소설가) -
그렇다. 하성란 소설가님의 말처럼 진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중반 이후만… 

ㅁ [4월의 물고기]를 읽다가 처음엔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확히는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선 단지 사랑 이야기는 아니겠거니 싶었다. 오히려 난 선우(남자 주인공)의 심리와 환경에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선우가 가진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에게서 선우가 느꼈을 무력함과 외로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그래서 서인(여자 주인공)이 느낀 ‘안개 같은’ 남자라는 이미지. 선우도 오죽 답답했을까… 그런 감정을 느꼈을 선우에게 정말 많이 몰입했다. 내가 그런 일을 겪어서 그랬던 걸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적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안개 같은’ 느낌은 안다. 내가 실제로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게 원해서 그런 이미지가 된건지는 알지 못한다. 선우도 그렇고 나도 그런게 이런 이미지는 사실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자기방어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한다. 요즘 나도 그런 이미지가 언제부터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몇몇 사건들이 기억나곤 한다. 지금은 그런 나를 그저 수긍하는 편이다. 그게 편해져서 그런걸지도… 하지만 선우는 그 원인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경우였으니, 스스로 받아드리기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그렇지 좋지 않은 경우였으니… (궁금하면 책을 보면 된다.)

ㅁ 선우의 입장에서 몹시 몰입했지만, 소설의 화자는 사실 서인이다. 서인이 바라보는 선우였지만, 선우의 속사정을 더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다. (사실 그건 둘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중반쯤 되면 ‘이거 각이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얼추 추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결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만 달랐고 오히려 나머지는 다 예상한대로 비슷하게 흘러가더라. 마치 그런 것이다. 드라마도 많이 보면 1화만 봐도 저 캐릭터가 뭘 할 지 예상하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다. 비슷하다 ㅇ 예측은 했지만, 그걸 하나씩 알아가는 건 항상 재밌다. 비밀을 벗겨내는 거니까. 나는 그런 과정을 보통 하나씩 벗겨지는 양파껍질을 상상했다. 이야기가 그런 느낌이었다. 하나씩 진실이 벗겨지는 듯해서 끝에 가서야 몰입할 수 있었다. 초반에 극히 지루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 둘이 사귀기 전과 사귀는 사이에 간격이 그냥 넘어갈 때 당황했다. 보다가 어느 새 사귀고 있었다. ‘?? 언제 사권거?’ 하면서 뒤로 돌아가 다시 읽은 게 사실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부분. 그 과정이 뻔하다고 생각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이 애초에 사랑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사랑이야기라면 서로 처음 만나고 사귀게 된 부분을 빠트리지 않았겠지. 
선우를 만나 절대적으로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래의 행복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인은 선우와의 인연이 트별하다느 느낌은 분명했다. 이러 '불구하고'의 사랑으 어쩌면 불구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이걸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면 뭐라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p.277
ㅁ 행복하지도 않았지만, 둘은 서로를 운명이라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건 확실하다. 하지만 결국 선우가 한 선택은 특별한 인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우의 그 선택조차 운명이었다면, 서인이 결국 그걸 느껴야 하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해버리면, 그 운명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운명이나, 우연 같은 말에서 가끔 그런 걸 느낀다. 나의 선택이 이미 정해져있다면, 누굴 만나고 인연이 되는 게 정해져 있다면, 갑작스런 어떤 생각이 다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그냥 조금 슬프다. 결국은 정해져버린 삶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선우의 선택이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선택밖에 없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수긍한다는 건 그만큼 슬픈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ㅁ 책 제목인 [4월의 물고기]라는 내용은 책에서 딱 2번 나온다. 선우의 과거에서,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그 의미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나오는 것이지만, 나는 그를 ‘4월의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서인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너무 슬퍼지니까. 선우의 운명이 그렇다는 걸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에필로그를 읽고 책을 덮으면서 제목을 다시 보았다. 선우의 인생이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참… 이렇게나 주인공에게 몰입한 적은 없었는데, 읽고 나서 조금 기분이 침울해졌다. 선우도 스스로를 4월의 물고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서인을 만나서 조금은 벗어나려고 했을 것 같은데, 또 마지막 선택은 그렇지 않아서… 선우가 자꾸 생각나는 결말이었다. 책의 주인공이 이렇게나 오래 생각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서인은 그에게 4월의 물고기 같은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그는 오히려 4월의 물고기가 아니라 나름대로 처절하게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그런 선우를 나는 아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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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할 걸 그랬어
김소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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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빛이 나는 법이다. 
[진작 할 걸 그랬어](위즈덤하우스) - 김소영 

ㅁ 8월의 책, [진작 할 걸 그랬어]에 대한 한 줄평을 말한다면, 바로 감상의 제목처럼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빛이 나는구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만큼 저자이자 한 때는 아나운서였고, 지금은 책방지기, 또는 애서가? 라고도 할 수 있는, 김소영 작가님의 책에서 모습은 빛나보였다. 에세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약간 책방여행집 같은 느낌도 나는 [진작 할 걸 그랬어]. 책에서 어떤 에너지를 받아가는 기분이었다. 

ㅁ [진작 할 걸 그랬어]라는 책의 제목은 무언가를 늦게 해서 아쉬워하는 느낌과, 동시에 이 일을 지금이라도 시작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두 가지 심경이 담겨있다. 물론 둘 다 결과론적이겠지만,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아마 작가님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과는 둘째치고 그 일을 과연 했는가 아니면 하지 않았는가.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진작 할 걸’이란 후회의 내용엔, 결과가 아닌 그 일을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에 대한 후회였다는 사실을. 

앞으로 내 삶에 또 다른 깨달음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방송인, 책방 주인, 혹은 그 무엇이 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싶다.
p. 135
;책의 내용은 사실 작가님이 책방을 시작하기 전, 여러 책방을 둘러본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거대 자본의 서점들이 대다수지만, 바다 건너 (요즘 한창 시끄러운) 일본엔 ‘우리나라보다 독서 인구가 많은 편이고, 출판시장이 어렵다지만 여전히 큰 편’이라고 한다.(페이지 35) 작가님은 글에서 책방을 할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마 여행하는 도중에 책방을 차리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시도 자체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인지 우린 잘 알고 있다. 책이라는 물건이 점점 사라지고, 디지털화 되면서, 점점 인터넷서점을 필두로 하는 대형서점들의 자본에 작은 책방들은 거의 문을 닫는 게 요즘 현실이다. 책방을 하더라도 유지를 할 수 없는 구조라면 시도조차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조차도 책을 좋아하면서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게 현실인데 말이다.(무엇보다 할인이 많다. 난 돈이 없으니까. 슬프다.) 책방을 가는 걸 좋아하더라도 누군가 사주지 않는다면 책방주인의 입장에선 유지할 수 없다. 자본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가님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방을 차리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책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저 추측을 해본다면, 책 표지에서 나온 것처럼 ‘책에서 결국, 좋아서 하는 일을 찾았다.’ 이 말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ㅁ 전반부에선 책방여행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작가님이 직접 차린 책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방의 현실적인 이야기랄까. 여러모로 힘든 점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일단 유지비용부터 시작해서, 서점들과의 차별적인 시도도 필요해 보였고, 재고정리부터 시작하는 몹시 힘든 일상은 여유롭게 책이나 보며, 책과 함께 즐기는 장면은 이미 저 멀리 던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역시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먹고 사는 것과 직결되는 일은 뭐든지 힘들고 스트레스다.) 그럼에도 작가님은 재밌어 하는 것 같다. 좋아서 하는 일은 이게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무한대로 뿜어나온다. 그게 멋있고 빛나보였다. 행복해보였다. 글에서도 이런데 실제론 어떠실까. 정말 책을 많이 좋아하시는구나… 괜스레 부럽기도 했다. 책방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부러웠다. 
 아쉬운 게 있다면, 후반부에 책방을 운영하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었다는 점이다. 전반부에 들어간 책방여행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 넘쳐 후반부까지 넘어온 듯한 느낌. 책방을 운영하면서 있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책방여행보다 너무 적어서 아쉬웠다. 책방 운영에 대한 어떤 팁과 노하우를 읽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비중에서 차이가 나서 아쉽다랄까. 하지만 이조차도 이해가 되었던 건, 이 책이 바로 ‘에세이’라는 점이다. 에세이이기 때문에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나눈다는 게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막 ‘왜 이렇게 쓰셨지?’라기 보단 ‘다음에 책방운영하는 이야기로 한 권 더 내주셨으면…’이란 마음이 드는 아쉬움이었다. ㅁ 앞에서 말했듯이 책을 읽고나서 어떤 기운을 받은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몰랐는데, 감상을 쓰다보니까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멋있어보이는 느낌. 그런 것처럼 행복하게 일을 하는 모습에서 약간의 부러움이 뒤섞인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책에서 그걸 배워가는 것 같다. 
 
ㅁ 작가님은 끝에서 책방에 대해 했던 말이 있다.
책방을 여는 데 까지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책방을 지속하는 일은 더덛욱 만만찮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나는 책방이 계속해서 늘어났으면 좋겠다. 독창적인 북큐레이션으로 책을 집어 들게 만드는 책방, 재미난 일을 꾸미는 창작자가 모여드는 책방, 인테리어가 멋진 책방, 맛있는 커피와 향긋한 차가 함께하는 책방, 채고가 잡화가 어우리진 책방, 한 분야만 파는 책방, 어떤 형태든 좋겠다. 사람들도 더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작은 동네 책방도 돈을 벌면 좋겠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책방이 생겨나기를.
p. 314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뭔가 편리하긴 하지만, 동네책방만큼 감성적이고 정말 ‘책’같은 느낌의 서점은 없는 것 같다. 대형서점은 뭔가 책을 책으로 보는 거라기 보단 자본, 또는 제품으로 보는 기분이다. 그래서 약간 아쉬웠는데, 작가님처럼 나 역시 생각은 비슷하다. 주변에 책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휴대폰의 짧은 글과 사진, 영상을 보더라도 하루에 조금이나마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진작 할 걸 그랬어]를 처음에 서점에서 보고나서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나 역시 언젠가는 책방을 차리고 싶은 사람이라서, 나보다 먼저 책방주인이 된 작가님의 모습이 궁금해서 였다. 작가님이 끝에 ‘진작 할 걸 그랬어’라는 말이 ‘진작 고민할 걸 그랬어’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하듯이, 나도 진작 고민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을 때 책방을 열고 그 때까지 고민한 걸 담아내는 책방을 열고 싶다. 한 자씩 짧게나마 써둔 내 책방 아이디어로 언젠가 나 역시 책방 주인이 되는 날을 기대하며,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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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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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 앞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산 자들](민음사) - 장강

ㅁ 장강명 작가님이 새 책을 내셨다.한 6월 쯤에 출판하신 걸로 아는데, 7월 끝자락이 되서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장강명 작가님은 무척 중요한 계기를 주신 분이다. 이런 글을 쓰고 책을 다시 잡게 해준 계기가 되었던 분이랄까. 장강명 작가님의 책 덕분에 책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는 삶을 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뽑으라면 어김없이 장강명 작가님을 뽑을 정도로 좋아한다. 좋아하는 데는 별 이유가 없지만, 첫사랑이 모두 기억나듯이, 소설과 글의 생활에 시작을 열어준 책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장강명 작가님의 책은 보통 직접 사서 읽는 편이다. 간직할 만한 이유가 명확하다. 지금 시대를 표현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르포 형식의 책 [당선, 합격, 계급] 이후 읽는 책인데, 제목부터 어떤 시사하는 지점이 느껴질 정도였다. [산 자들]이라니… 어떤 ‘불편함’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이런 글을 정말 잘 쓰신다고 생각한다. 

ㅁ 산 자들은 한 마디로 연작소설이다. 10편의 ‘불편함’이 담겨져 있는데, 그 소재도 무척 다양하다. 자영업부터 취준생, 위축들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고발자와 재건축 등. 뉴스 사회면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부터, 알려지지 않아서 더 슬픈 이야기까지.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진짜 한국에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불편한 진실들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래서 더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제목에서 처럼 바로 내 앞과 옆, 아니면 주위에 누군가에게 분명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 슬퍼졌다. 반면 단순히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약간 붕 떠버린 기분도 들었다. ‘에이 진짜 이러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산 자들]은 그저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곳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도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기에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우울한 현실에 나 역시 파묻혀버릴 것 같았다. 
 작가님도 그런 이야기를 쓰시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으셨던 것 같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는 한낮의 노동과 경제 문제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단순히 전시하기보다는 왜, 어떻게, 그런 현장이 빚어졌는지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p. 379 작가의 말 中
 바로 저 지점. 나는 단순히 전시하는 게 아니라 ‘왜’, 또는 ‘어떻게’ 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그저 뉴스나 사실보다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는 잘했고 잘못했고 명확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 역할로 소설은 적당한 것 같다. 현실과 다르게 조금 더 전지적인 시점으로서 우리는 그 상황을 관찰할 수 있으니까. 

ㅁ 그런 점에서 [현수동 빵집 삼국지]와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엄청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양쪽의 상황을 적절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정말 뚜렷한 입장들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소설을 쓴 방식도 시점이 자꾸 바뀌게 만들어져 있어서 어느 한곳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각자 살아남기 위해서 나름의 선택을 한 것이었을테니까.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양쪽이라기 보다 어떤 입장이든지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어느 편이라고 욕할 순 없었다. 물론 그 사단을 만든 자들이 완전 나쁜 사람이겠지만,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과 단지 그걸 말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진짜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새들은 정말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선 아래 문장이 엄청 기억에 남는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행정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체 이탈 화법을 쓴 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p. 378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모두 쓰지 않는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게 그렇지 않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달라서 마지막 문장이 과연 옳은 지는 모르겠다. 물론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선 확실하게 보이지만, 그것도 나의 관점에서 그렇지 않은가. 과연 저 교무 교감이나 학생 교감이 자기들의 일을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할까? 아마 그들은 스스로에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진작에 정신차렸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거라면 즉, 자신들이 하는 짓이 그릇된 걸 알면서도 그런거라면, 어떤 사정인지 알고나서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다. 같은 작품에 나오는 호웅이라는 인물처럼 각자의 사정이 있다면 또 모를 일이다.(그렇다고 해서 저 교무교감이나 학생교감의 편을 들 순 없다. 어떤 사정이든 전적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ㅁ 두 작품과는 다르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작품들도 있다. [사람 사는 집]과 [카메라 테스트], 그리고 [모두, 친절하다]을 보고 있노라면 (물론 극단적이겠지만) 씁쓸한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하나는 재건축 대상이 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즉 철거민)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취준생들의 이야기다. 이 부분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슈가 되기도 했어서, 엄청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단순히 사실을 나열한 기사들보다 더 안쪽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이와는 다르게 [모두, 친절하다]는 조금 다르게 신선했다. 처음에는 제목이 뭔소리인가 했는데, 읽다가 ‘아… 이거 정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피식 웃을 만한 요소도 있었고… 자세한 건 스포일테니 남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이런 현실이라서, 나도 저런 사람들 중 하나라서 더 씁쓸했던 것 같다. 이 사회가 모든 게 편해지고 삶의 질이 윤택해졌다고 하지만, 그만큼 각박하고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는 걸 너무 잘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화자 특유의 상태? ‘그러려니’하는 체념한 듯한 태도가 너무 와닿았다. 나도 그럴 때가 많다보니까. 그게 스스로에게도 좋은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이게 과연 정말 나에게 좋은 태도인가 싶었다.

ㅁ 책을 덮고 나서 왜 [산 자들]이란 제목을 정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이 나오는 단편은 기억하기론 한 개 뿐이었다. 그마저도 제목은 아니었는데, 왜? 뭐… 생각하기엔 여러가지 의미를 반영한 것 같다. 말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살지만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일 수 있다. 단편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 산 자들인데,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살아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명이 있다는 말과 다른 것이다. 사전에서 ‘살다’를 검색해보면, 당연히 여러 뜻이 있지만, 어떤 삶을 영위하다 라는 뜻도 있다. 이처럼 그들은 어떤 삶을 영위하는 자들로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주변의 이야기인 셈이다. 
 참 어려운 사회다. 그래서 씁쓸하다. 이 한국사회의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울하고 그런 사회가 지금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몸소 느낄 줄 안다면, 그것으로 [산 자들]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사회의 모든 면이 [산 자들]처럼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또는 어떤 기막힌 우연이 그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우연은 불운이 되어 누군가를 ‘산 자’들로 만들 수 있음을, 우리는 소설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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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 김광현 교수의 건축 수업
김광현 지음 / 뜨인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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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축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뜨인돌) - 김광현
- 전반부 -

이 책은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지금 건축을 배우고 있는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건축의 중요함과 소중함과 근본을 말하는 책이고, 모두를 위해 이 시대가 지어야 할 건축을 말하는 책이다.
- 머리말 中 -
ㅁ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만큼 책이 그 목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무로 비문학적인 책이라고 해서 이렇게 목적성을 대놓고 보여주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마치 책이 그냥 ‘날 읽으면 건축이 가르쳐주는 걸 반드시 알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표지조차도 노출콘크리트 이미지로 만들어놔서 그런지 참 거대한 벽 같이 느껴지고 그 두께는 그런 인상을 갖는 데 한 몫 했다.(무려 705페이지였다. 진짜 많이 두껍다.) 살 엄두가 나지도 않았고, 이걸 들고다니면서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주말마다 틈틈히 읽어서 겨우 전반부를 읽었다. 후반부까지 읽고 감상을 쓰기엔 너무 양이 많아질까봐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서 감상을 쓰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앞 내용에서 들었던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고, 일단 정리가 되지 않아서 이 감상은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기분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ㅁ 저자이신 김광현 작가님은 전문적인 작가는 아니다. 작가님보다는 교수님이 맞다. 건축학계에 오랫동안 몸담으셨던 교수님이다. 교수님이 남기신 건축에 대한 어떤 소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건축학을 전공하신 분이 바라보는 건축학에 대한 이야기랄까. 보통 이런 느낌의 비문학이 많으니까. 한창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던 때라, 왠만한 책들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구매했다. 그게 벌써 올해 초였는데… 살 때만 하더라도 ‘건축이 우리에게 뭘 알려줄까?’ 이게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학계(여길 학계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건축이라는 어떤 분야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에 몸담은 교수님이 바라보는 자신의 분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지 궁금했던 것 같다. 참고로 김광현 교수님은 작년에 퇴임하셨다고 한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야에 고민을 담게 된다. 그 흔적이 담겨있을 교수님의 건축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ㅁ 가장 위에 인용한 머리말은 책에 대한 목적성을 보다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가 지어야할 건축’이라는 게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모든 건축에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 최소한 집이라는 건축이 있을 것이며, 거기에 어딜 가든 건축 안에 있거나 건축 주위에서 생활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없기 때문에 건축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건축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조금 많이 느낀다. 꼭 어떤 유형의 건물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공간만 보더라도 그렇다. 내가 사는 곳만 하더라도 마땅히 쉴만한 곳이 없다. 앉아서 쉴만한 넓은 공터가 없다. 그리고 걷고 싶은 길이 없다. 모두 아스팔트로 된 차도뿐이다. 사방에는 차량, 아니면 오토바이가 돌아다니고, 그런 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사고가 안나는게 다행이라고 본다. 작은 놀이터가 있지만, 주변 건물에 비해 너무 초라해보이고, 그렇다고 주변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느낌들. 좋지 않은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이런 환경. 난 ‘이 시대의 건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ㅁ 총 10장으로 이뤄진 책은 약간씩 연결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각 장별로 따로 읽더라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아직 5장까지 읽은 것만 보면 그렇다. 다만 약간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 쉬운 건 맞다고 생각한다. 각 장별로 살펴보자면, 1장은 ‘건축’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한다. 왜 집을 짓고, 건축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건축’을 정의하는 시도라도 보았다. 2장에선 지금 현재 우리가 아는 ‘건축’이 아니라 그 이전의 건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1장과 약간 이어져있는데, 건축이라는 행위의 본질, 근원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우린 건축을 ‘만든다고’ 말하지 않고 ‘짓는다’라고 말하는지 조금 생각해보게 된다. 짓는 것은 하나씩 쌓아 올린다고 본다면, 무엇을 쌓아 올려야하는지 진지하게 고찰해봐야한다. 단지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덮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건물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이용되는지, 사용자와 주변 환경이 어떤 것들이 필요로 하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과정. 그게 본질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3장은 건축을 누가 짓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회’가 건축을 짓는다는 걸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의 구성원과 요구가 공간의 필요성을 생산하고 그렇게 유형화하는 과정이 바로 건축이라는 것이다. 바로 장의 제목처럼 ‘사회가 만드는 건축’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었다. 4장을 본다면, 사회에서 정확히 어떤 점들이 건축을 짓는 걸까에 대한 대답이다. 바로 시설, 제도, 그리고 공간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여기선 바로 이 부분이 정확히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건축물은 누군가와 함께 쓰기 위해 만들어진다. … 건축의 시설은 사람들이 함께 쓰는 가치를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 건축이란 사람이 모여야만 만들어지는 사회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건축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p. 291
 사람이 모이면 제도가 생기고, 그게 시설을 만들고 결국 공간을 표현하게 된다. 전반부의 마지막이었던 5장은 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은 도시’로서 건축을 표현했는데, 모여 살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들이 이루는 공공성, 특히 공공건축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공성이 마치 ‘작은 도시’라고 표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ㅁ 1장에서 5장까지 읽으면서 자꾸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건축은 인문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도, 공학도 아닌 건축 그 자체라는 점이다. 건축을 어떤 분야로 해석하기엔 너무 특이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건축을 짓는 과정에서 공학이 적용되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면모도 엿보인다. 건축의 외관이나 주변환경과 미치는 영향을 본다면 예술적인 면모도 있다. 그런 모든 방향에서 건축을 살필 수 있지만, 그게 건축의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건축을 어느 하나의 분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 읽는 내내 그런 관점으로 책을 쓰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건축은 그저 건축이라는 하나의 분야로 봐야한다는 주장은 책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보단 문장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5장을 관통하는 한 가지 내용은 건축은 만들면 다가 아니라는 것. 건축 자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이용하는 사람부터 주변 환경까지, 심지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곳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영향을 주지 않는 건축은 없어서, 우리는 건축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머지 장을 읽다보면 좀 더 뚜렷해질 것 같은 느낌만 있을 뿐이다. 

ㅁ 어떤 책이든 읽다보면 관심가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주로 내가 관심을 두던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4장에 있던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요즘 한창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먼 옛날, 자기가 선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자기가 학생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생님들과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이 나무 밑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이것이 학교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루이스 칸은 말했다.
p. 335
 책은 건축에 관해서 이 인용문을 사용하는데, ‘나무 밑’이란 장소는 아직 건축물 이전이지만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학교라는 건축을 지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르치려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에 공간과 장소를 부여하라는 뜻’(같은 페이지)으로 루이스 칸은 말한 것이다. 이건 건축에서만 국한될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 더 나아가서 ‘교육’이란 본질에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본질이라는 게 모든 걸 해결해주지도, 그렇다고 지금 현실과 잘 들어맞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제도와 어떤 정책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 바로 건축이나 아니면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도 적절한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잘 생각해보면 학교의 이미지가 모두 비슷하다는 건, 모든 학교가 비슷하게 만들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사회가 다양성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것저것 정책으로서 점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너무 단편적인 시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차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아직은 많이 아쉬운 게 현실이다. 건축에서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정책, 제도보단 정말 건축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정책, 제도는 사실 일상적으로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즉 현장에 와닿지 않는다. 눈으로 보이는 부분도 없고 일상에서 매일 보는 것도 아니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다. 건축이 바뀌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바뀐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매일 본다. 손에 잡힌다.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오히려 정책 제도보다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다. 

ㅁ 다른 학문들도 비슷하겠지만, 건축은 특히 더 어려운 것 같다. 생각할 부분이 너무 많은 듯한 느낌이랄까? 다른 학문도 못지 않겠지만, 건축은 그 분야에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주변 모든 걸 생각해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괜히 건축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5년을 다니는게 아닌 것 같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특히 사회적인 부분은 더욱 더 말이다. 그럼에도 교수님이 그나마 잘 정리하셔서 그런지 각 장에서 설명하는 지점은 뚜렷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다만 양이 많아서, 포인트가 되는 어떤 내용을 잘 붙잡지 않으면 무슨 내용을 읽는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 제공된 이미지가 있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예시들도 많아서 아쉬웠다. (건축 관련 책을 읽다보면 항상 이 점이 거슬린다. 이미지를 찾아가며 책을 보는 습관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나도 읽다가 중간에 놓쳐서 다시 돌아가 읽었던 적도 많았고, 읽는 내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분명 읽지 않으니만 못하게 될까봐 굉장히 힘들게 읽었다. 아직 5장이나 더 남았는데… 
 학문을 책 하나로 다 설명하려는 것은 어쩌면 말도 안될지 모른다. 건축이라는 학문이, 아니면 실제 건물들이, 장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상호적인 관계. 영향을 받고 주고 하는 그런 관계.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이 공간이나 장소를 포함한 건축일 수 있고, 심리적인 요인일 수 있다. 어쨌든 그런 걸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이 뒷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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