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대한 결과가 훌륭한 토대에서만 나온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이키는 어떤 꿈이 결단력, 끈기, 창의력, 풍부한 지략, 수많은 땀방울과 함께할 때 실제로 달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멋진 표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꿈을 현실로 이룩하고자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재능을 쏟아 부은 두 사나이가 있다.

바로 오리건 대학교 육상부의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빌 바워만Bill Bowerman과 같은 대학교에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던 육상선수 필 나이트Phil Knight였다.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바워만 감독은 오리건 대학 선수들이 더 나은 기록을 내도록 끝없이 노력했다. 그는 움직일 몸만 있다면 누구든 운동선수나 마찬가지라고 굳게 믿었다. 이 말은 짧고 단순하지만, 훗날 그가 세운 회사는 실제로 전 세계 수백만 인구가 나이키 제품을 착용한 운동선수들처럼 빠르고 민첩하면서도 힘차게 달리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1950년대의 신발 회사들은 바워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때부터 그는 직접 신발을 개조해 그것을 육상선수들에게 제공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강하게 믿었으며 기존 신발 회사가 새로운 발상을 거부할 때도 단념하지 않았다. 반대로 몇 년 후에 그 회사들이 장대한 역사에 편입할 멋진 기회를 날려버렸음을 깨닫고 얼마나 낙담했을지 한 번 생각해보라.

 

 

 

 

 

빌 바워만이 육상선수들을 위해 더 좋은 신발을 만들려고 고심하던 사이, 필 나이트는 그 나름대로 양질의 육상화를 제조하겠다는 생각에 전념하던 중이었다. 중거리 육상선수였던 그는 더욱 발전된 운동화를 만드는 데 실질적인 시각을 부여할 수 있었다. 나이트는 오리건 대학을 졸업하고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스탠퍼드 대학으로 진학했다.

 

 

빌 바워만과 필 나이트에게는 오리건 대학 출신이라는 점과 더 나은 신발을 만들겠다는 열망 그 이상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따지면 이 둘은 그야말로 피를 나눈 형제와 같았다. 바다 건너편의 신발 회사로부터 아무 답변도 받지 못한 나이트에게는 또 다른 모험을 향해 나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 지점에서 더욱 어려운 선택을 했다. 결국 그가 고른 길은 육상부에서 자신을 가르친 감독님과 다시 힘을 합치는 것이었고, 그렇게 전설적인 만남이 시작되며 그들의 꿈은 마침내 날갯짓을 시작했다.

 

 

1948년부터 대학 육상부 감독 자리를 맡은 바워만은 필 나이트가 보낸 견본품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에게 감히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 가지 했다. 그는 나이트와 동업을 하며 자신이 직접 고안한 신발 디자인을 오니츠카 타이거에 제공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힘을 합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창업 자본으로 각자 500달러를 투자하여 1964년에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를 설립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