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록
소멸은 그저 하나의 변화일 뿐이다.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은 우주의 본성이다. 이에 복종함으로써 모든 사물이 제대로 순환하며, 자고이래 줄곧 유사한 방식으로 순환을 거듭해왔다. 이는 끝없는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인생에서 운이란 예측하기 어렵다. 때로는 앞이 막막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을 괴롭히던 일은 어느덧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때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앞날이 창창하여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다가도 어느덧 빛은 사라지고 황량한 사막에 던져지기도 한다.
당나라 때 호북(湖北) 강릉(江陵)의 초(楚) 땅에 곽칠랑(郭七郞)이라는 갑부가 살았는데, 부근의 수많은 상인들이 모두 그에게서 물건을 가져다 내다팔았다. 그러던 어느 해, 도성의 한 상인이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서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그는 직접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밀린 외상값 5,6천만 냥을 받아냈는데, 그만 도성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 그 후로 날마다 환락가를 드나들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다. 서너 해를 이렇게 보내면서 곽칠랑은 가진 돈의 절반을 탕진했다. 당시 조정은 부패하여 매관매직과 뇌물수수가 성행했다. 문득 ‘벼슬’에 욕심이 생긴 곽칠랑은 수백만 냥을 들여 횡주(橫州) 자사(刺史) 자리를 샀다. 그리고 금의환향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득의양양해져 으스댔다.
그런데 그가 돌아갔을 때 강릉은 뜻밖에도 왕선지(王仙芝)가 이끄는 봉기군의 공격을 받아 예전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호화롭던 곽칠랑의 가옥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가족들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을 수소문한 결과, 동생들은 봉기군의 손에 살해되었고 어머니만이 하녀 한 명을 데리고 초가집에서 삯바느질로 연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곽칠랑의 수중에 2,3백만 냥이 남아 있어 어머니는 조금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가산은 탕진했지만 다행히 관직이 있으니 다시 집안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잡은 그는 배를 사서 어머니를 모시고 광서(廣西)의 횡주 땅으로 떠났다. 배가 장사(長沙)를 지나 상강(湘江)에 이른 날 밤, 그들은 한 사당 근처에 정박하기로 하고 큰 나무에 배를 묶어두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거센 바람과 폭우가 몰아치고 강물이 언덕까지 집어삼킬 듯 무섭게 출렁댔다. 그 바람에 배를 묶어두었던 나무가 부러지면서 배가 가라앉고 말았다. 곽칠랑은 뱃사공과 함께 가까스로 어머니를 구해냈지만 하인과 나머지 재산은 모두 잃고 말았다.
날이 밝자 곽칠랑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당으로 가 잠시 기거할 방을 빌렸다. 그러나 난리 통에 병을 얻은 어머니는 며칠 못 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기댈 가족조차 모두 잃어 막막한 처지에 놓인 곽칠랑은 지방 관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관리는 호의를 베풀어 그의 어머니를 장사 지내주고 얼마간의 노자까지 챙겨주었다. 당시에는 관리가 부모상을 당하면 3년이 지나 탈상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곽칠랑은 자연히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고, 게다가 인신(印信, 도장-역주)까지 잃어버린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곳에 방을 얻어 지내며 시묘살이(부모가 죽으면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지내며 부모의 넋을 기리는 효행-역주)를 시작했다.
의지할 데 없이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각지를 오가며 익히 보아온 뱃사공 일로 입고 먹을 것을 해결했다. 몇 년이 지나자 곽칠랑에게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평범한 뱃사공의 모습이 되었다.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키잡이 곽사군(郭使君)’이라고 불렀다. ‘사군’은 고대에 태수(太守), 자사(刺史)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한때 부러울 것 없는 갑부였던 곽칠랑은 이렇게 자신이 가난뱅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날마다 사치스런 향락에 빠져 지냈지만 그의 엄청난 재산에 비하면 이는 티끌만큼이나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관직을 얻었을 때, 그의 인생은 새로운 날개를 단 듯 보였고 누구도 그것이 한낱 순간의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결국 ‘키잡이 곽사군’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이치대로 돌아간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운명은 참으로 절묘하고 그 어떤 장인의 작품보다 정교하지 않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마치 일련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급물살과 같다. 방금 목격한 사물이 금세 사라지고 또 다른 사물이 이를 대신하지만, 이 역시 곧 사라진다.” 삶은 끝없는 변화로 가득하며, 인생 역시 가늠할 수 없는 변화로 넘쳐난다. 빈부, 귀천, 미추(美醜)를 막론하고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변화의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소리 없이 변화하는데, 우리는 반가운 변화를 수확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변화는 손실이라 부른다.
그러나 수확이든 손실이든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그저 변화의 한 형식일 뿐이다. 이는 당신의 행동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당신의 행동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든 당신은 반드시 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투덜대며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당신은 즐거운 변화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반갑지 않은 변화는 불쑥불쑥 찾아온다. ‘변화는 우주의 본성’이며, 우주의 변화는 정해진 논리에 따를 뿐 누군가의 바람에 따라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략)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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