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그는 인도 국민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인도인이 갖고 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 인도 각지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촌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그 유명한 소금 행진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민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회의는 자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 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 회의파, 이슬람 동맹, 영국 정부 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고,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간디는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 역사 속 9인의 리더에게 배우는 평생 경쟁력, 서른살 리더십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