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인류가 인도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들의 권익과 평등을 부르짖고 영국의 지배에 맞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간디를 존경한다. 그는 평생 자신이 뱉은 말은 실천에 옮겼고, 철저하게 금욕했으며 검소하게 살았다. 불가촉천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을 맹세하고 그들의 공동체에서 평생을 함께 했다. 그런데 간디는 인도 명문가의 자제로 영국에서 유학하고 변호사였던 인물이다.

 

엘리트였던 그가 어떻게 해서 최하층민을 위하고 독립 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을까? 비록 조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그는 부와 명예를 지닌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영국에서 유학했고 집안이 부자였기 때문에 영국인들도 그를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다. 인도에서도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변호사로 갓 부임한 남아프리카에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차 1등칸에 탔다가 유색인종이라고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때 간디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조국의 현실을, 최하층민의 입장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 역사 속 9인의 리더에게 배우는 평생 경쟁력, 서른살 리더십 중에서 -

인도 독립 운동의 아버지 간디는 위대한 혼, 큰 성인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로 불린다. 그의 삶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쓰였다. 천 한 장을 허리에 두르고 가난을 맹세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같아지려고 했고, 옳은 길이 아니면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전 인류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먼저 그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자.

 

 


간디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 식민지 시절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어머니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종교를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간디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아들 간디에게 고기를 먹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들어 일평생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어려서는 인도에서 교육받았으나 1887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 대학에 입학하였다. 영국에 머물던 3년 동안의 생활은 그의 인격과 정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91년 변호사가 되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그들은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간디는 불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해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간디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이때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15년에 인도에 돌아온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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