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덕을 갖춘 사람, 본성을 발굴하는 데 능숙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좌우할 수 있다.

 

첫째, 맡은 책임을 다한다.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고 타인과 화목하게 지내며, 성실히 일하여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타인을 위해 봉사한다. 둘째, 환경에 적응하고 만족한다. 삶의 처지를 담담하게 이해하고 운명의 변수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요컨대 방종하지 않고 인위적인 통제를 가하지 않을 때 도리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생명은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운명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으니,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 당신은 운명과 융화될 것이므로 무슨 통제가 따로 필요할까?


그런데 현실의 우리는 늘 통제에 열중한다. 시간을 통제하고 운명을 통제하려 든다. 옛 사람은 ‘장생불로’의 비법을 찾고자 열망했고, 현대인은 시간의 터널을 넘나들 수 있기를 꿈꾼다. 옛 사람은 하늘을 숭상했고, 현대인은 과학을 맹신한다. 요컨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기 위해 부, 권세, 명성 등 가능한 한 더 많은 것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연의 본질에 따르면 모든 것은 흐르고, 또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깨끗이 씻겨 나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삶에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하나의 점이며, 실체가 흐름 속에 있을 때는 느리게 느낄 뿐이다. 신체는 쉽게 분해되고, 영혼은 소용돌이의 흐름과도 같으며, 운명의 수수께끼는 풀 수 없고, 명성은 결코 현명한 판단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신체에 속한 모든 것은 오직 급류와도 같고 영혼은 환상일 뿐이니 생명은 한바탕 전쟁이다. 스쳐가는 나그네는 지나가고 나면 그 명성도 빠르게 망각의 강 속으로 사라져 잊히고 만다.”


모든 것이 흘러가기 마련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잡으려 하는가? 결국 잡는 것은 공허한 환상일 뿐이며 얻는 것은 한없는 번뇌와 실망뿐이다.
많은 사람이 다음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두 가난뱅이처럼 허무한 존재를 오로지 갖기 위해 격렬한 경쟁을 벌인다.

 

두 가난뱅이가 함께 밤길을 걷다가 길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아, 가다가 큰돈을 줍는다면 어떻게 나눌까?”
나머지 한 사람이 말했다. “만일 자네가 돈을 줍는다면 그걸 본 사람에게도 권리가 있으니 자네는 나에게 절반을 나눠줘야지.”
처음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건 안 되지! 줍는 사람이 임자지, 뭣 때문에 자네에게 절반을 나눠준단 말인가?”
나머지 한 사람이 화를 내며 고함쳤다. “뭐? 우리가 함께 가다가 돈을 줍는다면 당연히 각각 반씩 나누어야지 설마 자네 혼자 꿀꺽하겠다는 건가? 자네가 이렇게 재물을 탐하는 자인 줄은 몰랐군. 이래도 친구라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점점 흥분했다.
처음에 말한 사람도 소리치기 시작했다. “무슨 근거로 나를 욕하는 거야? 자네가 뭔데?”
두 사람은 갈수록 격렬하게 다투며 화를 내다가 결국에는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사람이 이들을 말리며 말했다. “여보시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싸우고들 있소?”
그중 한 명이 말했다. “마침내 다툼을 해결해줄 분이 나타나셨군. 당신이 시비를 좀 가려주시오. 우리 둘이 길을 떠나 함께 걷다가 이 놈이 돈을 주웠는데 나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독식하겠다고 한다오.”
나머지 하나도 질세라 말했다. “내가 주운 돈이라면 당연히 내 것이지. 이 녀석은 뭘 근거로 절반을 요구하는 거요?”
중재에 나선 사람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흥분하지 말고, 먼저 주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말해보세요.”


다투던 두 사람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줍지는 않았어요!”
중재하던 사람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그렇게 다투다니, 그럴 필요가 어디 있소?”


미래는 아마도 결코 허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필사적으로 쟁취하려는 것이 어쩌면 이 두 가난뱅이의 줍지도 않은 돈일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기왕 알 수 없는 것이라면 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현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을 살고자 하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누구나 잃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삶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자신의 삶이며, 누구나 지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삶이 아니라 지금 소멸되어가는 자신의 삶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긴 삶이거나 가장 짧은 삶이거나 결국에는 같다. 한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즉 사람이 오직 현재만을 소유한다면, 소유하지 않은 것은 잃을 수도 없다.”


현재는 당신이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따라서 현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를 소중히 여겨 생명을 한 떨기 꽃처럼 찬란하게 피어나도록 하고, 이슬방울처럼 다른 생명을 영롱하게 적실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재를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목적 없는 일을 행하지 말고, 허위와 위선을 멀리하며, 남이 어떤 일을 행함에 간섭하려 들지 말라. 또한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과 그에게 분배된 모든 것에 관해 그것이 무엇이든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받아들여라. 마지막으로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이 별다른 것이 아님을 인식하라. 이는 모든 생물을 이루는 원소의 분해일 뿐이다.”
또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일로 괴로워하지 말라. 만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지금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바로 그 이성으로 미래의 일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 과거는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를 잘 활용하여 눈에 보이는 일을 행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행하며 진심을 다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면, 삶이 주는 재료가 미미하다 할지라도 당신은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덕성(德性)의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는 약속이나 한 듯 관점이 일치한다.


어느 날 누가 석가모니에게 물었다. “성자시여, 당신은 숲속의 초라한 초가집에 살며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내면서도 어째서 이렇게 기뻐합니까?”
석가모니가 대답했다. “과거를 슬퍼하지 않고 미래를 욕심내지 않으며 마음을 지금에 매어두니 이처럼 편안합니다.”


그렇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있을 당시 승려가 누릴 수 있는 물질은 극히 빈약하여 걸인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걸인처럼 지내며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늘 온화한 기쁨이 넘쳤으니, 제왕과 장상이라 한들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그 기쁨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마음을 지금에 매어두고 눈앞의 모든 것을 즐겼고 심지어는 그들의 번뇌와 아픔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오직 ‘마음을 지금에 매어두는 자세’야말로 삶의 진정한 맛을 알고 삶의 참뜻을 살리는 길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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