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록
미래의 일로 괴로워하지 말라.


만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면, 지금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바로 그 이성으로 미래의 일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한 농부가 이른 새벽 읍내를 향해 집을 나섰다. 라일락꽃이 활짝 핀 수풀 옆을 걷던 농부가 멈춰 서서 오른손에 들었던 쌀자루를 왼손으로 옮겨 들고 먼지를 털어내려는 순간, 크고 영롱한 이슬방울이 그의 손바닥에 똑 떨어졌다.


농부는 잠시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이슬방울에게 말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니?”
“당신은 나를 삼키려고 하는군요.” 이슬방울이 말했다.
“보아하니 너는 나보다 더 가엾은 신세로구나. 목숨이 남의 손에 달렸으니 말이야.”
“틀렸어요! 나는 가엾다는 게 뭔지 몰라요. 나는 이전에는 커다란 라일락 꽃봉오리 한 송이를 적셨고, 그 덕에 꽃이 아름답게 피어났죠. 이제 또 다른 생명의 갈증을 달래줄 수 있을 테니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고 행복이에요. 아무런 후회도 없답니다.”

 

농부는 한동안 가만히 이슬방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묻고 고민해온 문제다.
이슬방울의 말 속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농부는 자신의 세계관에 비추어 문제를 보고 자신의 운명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 한편, 작고 약한 생명을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의 운명이 과연 이 농부보다 나을까? 고귀한 황족이든 비천한 개미든 누구라도 자신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아 나이가 들면 늙고, 죽을 때가 되면 눈을 감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또 다른 것들을 통제할 수도 있다. 생명의 사이에는 양적인 차이만 존재할 뿐 질적인 차이는 없다. 만일 생명의 의미를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두고, 성공과 행복의 지표를 더 많은 것을 통제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작고 약한 이슬방울이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듯한 삶의 자세에 있다. 이슬방울이 운명을 통제하는 방법은 통제하지 않고 천성과 처지에 운명을 맡긴 채 삶을 자유롭게 누리는 것이었다. 그가 아름다운 꽃을 적신 것은 희생을 위해서도, 요구를 받아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잘할 수 있고 또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가 농부의 입에 곧 들어가게 될 것은 행운도, 불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원래 이슬방울이 해야 할 일이고 늘 일어나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이슬방울이 보여준 삶의 태도는 바로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자연을 따르는 삶’이며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거듭 강조한 ‘본성에 따른 삶’이기도 하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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