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어록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안은 것은 벗어나지 않으며, 이리하면 자손의 제사가 끊이지 않는다. 도로 몸을 다스리면 그 덕은 참되고, 도로 가정을 다스리면 그 덕은 여유가 있고, 도로 고을을 다스리면 그 덕은 오래가고, 도로 나라를 다스리면 그 덕은 나라를 풍성하게 하고, 도로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은 천하에 두루 미친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를 행하기에 능한 사람은 영원히 도를 떠나지 않고, 덕을 닦기에 능한 사람은 영원히 덕을 버리지 않으며, 이러한 사람은 백세에 길이 빛나 영원토록 후세의 우러름을 받을 것이다.
노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 원칙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덕행이 비로소 진실하고, 도덕적인 수양으로 가정을 감화시켜야 덕행이 비로소 여유로우며, 도덕적 수양으로 한 고을을 감동시켜야 덕행이 비로소 오래 이어지고, 도덕적 수양으로 한 나라에 영향을 미쳐야 덕행이 비로소 풍성해지며, 도덕적 수양으로 천하를 이끌어야 덕행이 비로소 넓고 크게 된다.


 노자의 도덕관은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수련 과정과 거의 같다. 노자와 공자, 두 성인의 사상 관념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 문제에서만은 놀랄 만큼 일치한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에서 시작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일하게 옳은 처세의 도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이 분명한 누구라도 험난하고 굴곡진 인생을 경험하면 결국 이 점을 발견할 것이다.


 젊은 시절 겁 없는 혁명가였던 버처(Butcher)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중년이 지나 그는 세상이 자신으로 인해 바뀌지 않으며 자신은 생애의 절반을 헛되이 보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주님, 세상을 바꾸고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저의 가족, 저의 친구를 비롯한 제 주변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십시오.”
노년이 되었을 때 버처는 가족들조차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프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훗날 버처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바로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려 힘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소홀히 한다. 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현명하지 못한 일인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이 이처럼 현명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강요한다. 예컨대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가 예쁘고 상냥하고 가사일도 잘 하면서 검소하고, 특히 자신에게만 사랑을 바치길 원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떨까? 마음대로 행하고 습관대로 지내며 기회가 있으면 밖에서 여자를 좀 만난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아내에게도 남편을 위해 준비한 나름의 설계도가 있다. 남편의 그것과 너무도 닮은 설계도 말이다. 두 사람은 상대의 교양과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은 변화하려 들지 않으니 자연히 갈등이 생긴다. 물론 상대에게서 어떠한 변화도 발견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사장은 직원들에게 근면함, 성실한 업무태도, 정책에 대한 충실함을 요구하고, 유능하면서도 돈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란다. 직원은 어떨까? 그들의 사장이 자상하고 인재를 중시하며 봉급을 많이 주면서도 요구는 까다롭지 않기를 바란다. 양측은 상대가 변화하기만을 바라므로 자연히 충돌이 빚어질 뿐 상대는 자신의 바람대로 바뀌지 않는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실현하기 쉬운 자신의 변화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설계도를 준비하여 도덕적 자질을 높이고, 그리하여 당신이 타인의 눈에 도덕적인 군자로 비춰질 때 당신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가족부터 다스려야 한다. 가족이 덕성을 잃었다면 외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말은 설득력을 잃는다. ‘가정을 다스리는 일’ 역시 비교적 실천하기 쉽다. 쉬운 일은 제대로 해내야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어려운 일도 실현가능해진다.


 전류(錢?)는 출신이 빈한한 인물로, 훗날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그의 생활은 사치스러워졌고 고향에 거대한 호화주택까지 지었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그는 대규모 호위대를 이끌고 기세등등한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집에 올 때마다 그의 아버지 전관(錢寬)은 집을 비워 일부러 그를 피했다. 한번은 전류가 홀로 걸어서 고향을 찾아 마침내 아버지를 만났다. 그가 아버지에게 만나기를 꺼린 이유를 물었다. 전관이 대답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던 집안인데, 오늘날 네가 작은 벼슬자리 하나 꿰찼다고 겸손을 알지 못하니 나는 너로 인해 우리 집안 전체가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널 만나지 않으려 한 게야.” 이 말을 듣고 전류는 무릎을 꿇고 울며 아버지의 교훈을 반드시 마음에 새기겠노라 다짐했다.
 이로부터 전류는 매사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훗날 오월(吳越)왕이 되고 나서는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엄격했다. 어느 섣달 그믐날 밤 전류는 자녀들과 모인 자리에 악대를 불러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런데 두 곡의 연주가 막 끝나자 그는 악대의 연주를 중단시켰다. 그의 자녀들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정월초하루를 기다리는 밤이라 백성도 모두 흥겹게 즐기는데 하물며 왕가가 아닙니까?” 전류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왕가가 어째서 백성보다 우월해야 하느냐?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밤새 술잔이라도 기울이는 줄 알겠구나. 그런다면 대신들은 나를 흉내 내고 백성은 대신들의 모습을 따라 할 테니, 이처럼 윗물이 맑지 못해 아랫물 또한 더러워지면 나라 전체가 흥청망청할 것이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전류는 ‘제가(齊家)’를 안다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전관은 대단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다. 냉정하고 일관된 모습으로 아들에게 깨우침을 주었으니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이가 어릴 때 ‘반항’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다. 요행히 아이가 출세하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우월감에 빠져 과시하며 아이에게 잘못이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 간혹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에 담지 못한다. 전관이 높은 신분인 아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높은 도덕과 품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이 앞장서서 덕행을 실천하면 가정에 그 향기가 퍼지고 주위 사람들이 이에 감복하여 알게 모르게 당신의 행동을 따라할 것이다. 이리하여 당신은 고을 전체를 감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삼국(三國)시대의 관녕(管寧)은 학문이 출중했지만 벼슬을 원치 않아 날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며 소박한 전원생활을 했다. 그가 사는 마을에는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마을사람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이 거의 비슷하여 물 길러 오는 시간 역시 거의 같았다. 그러니 늘 줄을 서서 기다렸다. 우물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일로 마을사람들은 서로에게 불만을 품고 반목하며 지냈다. 관녕이 이를 보고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관녕은 물 긷는 도구를 많이 사서 미리 물을 길어 놓았다. 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관녕의 뜻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서로 양보했다. 다툼은 사라졌다.
 어느 날 뜨거운 햇볕아래 매어둔 이웃의 소 한 마리가 배고프고 갈증이 났던지 줄을 풀고 관녕의 밭에 뛰어들어 작물을 먹어치웠다. 관녕이 이를 보고 소를 때리지도, 그 주인을 욕하지도 않고 소를 서늘한 곳으로 끌고 가서 소에게 풀과 물을 먹이며 돌봐주었다. 이 일을 알고 감격하고 미안했던 주인은 만나는 사람에게 늘 관녕의 인품을 칭찬했다. 그 마을에는 더 이상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예양(禮讓)의 마을’이라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유가, 도가에서 모두 교화(敎化)를 중시하는데, 공자의 교화는 말과 실천 두 가지를 모두 중시했다. 그에 비해 노자의 교화는 솔선수범에 초점을 맞추어 이치를 이야기하기보다 행동하는 것을 중시하며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말 아니하는 가르침을 행하다-역주)”를 강조한다. 관녕은 말로 떠드는 충고가 아니라 스스로 선행과 덕행으로 실천하여 보여줌으로써 ‘한 마을’을 교화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노자의 자연의 도가 아닌가.
 ‘도로 나라를 다스림’과 ‘도로 천하를 다스림’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말하기도 한다. 이는 반드시 나라의 왕이나 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을 견지하면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고 천하는 자연히 당신으로 인해 감화된다. 노자, 공자 모두 국왕이 아니었지만 대대손손 모든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니 그 영향력이 어찌 천하에만 그치겠는가? 레이펑(雷鋒)은 그저 평범한 병사로서 남을 기꺼이 도왔을 뿐이지만, 그 평범하고도 위대한 정신은 수대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떤 이는 ‘치국평천하’ 하려면 반드시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도덕 수양이 되어 있지 않다면 권력을 가지더라도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칠 뿐이니 천하를 어찌 교화할 수 있겠는가? 히틀러(Adolf Hitler)는 한 나라의 원수가 되었지만 도리에 역행한 그의 모습은 반면교사가 되어 후대에 경계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본 장에서는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안은 것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부분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뽑히지 않음’과 ‘벗어나지 않음’은 도덕적 기준을 견지하며 외부 환경에 의해 자신의 품성에 영향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세우고 ‘잘’ 안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반드시 자연의 도를 따라야 하는데, 여기에는 흔히 소홀히 하기 쉬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근본을 지켜라.
 이른바 덕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됨이 좋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관건은 본분을 지키고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며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됨의 근본이다. 남을 돕는 데는 열심인데 정작 자신의 일이나 생활은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정(鄭)나라 재상 경차(景差)는 마음씨가 고운 인물이었다. 어느 해 겨울 한 남자가 맨발로 강을 건너다 발이 얼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경차가 마침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그 남자를 부축해 자신의 가마에 태우고는 자신의 옷을 벗어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경차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이 이처럼 따뜻하게 보통사람을 배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晋)나라 숙향(叔向)이 이 일을 전해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 “한 나라의 재상이란 사람이 참으로 답답하지 않은가? 좋은 관리가 부임하면 3개월 만에 수로가 완성되고 10개월 만에 다리를 세워 가축들조차 강을 건널 필요가 없다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숙향의 말은 정곡을 그대로 찔렀다. 경차는 본래의 직무에 주도면밀하지 못했으니 어쩌다 좋은 일을 몇 번 했다고 그의 직무상 허점이 없어질 수 있을까? 유향(劉向)은 이렇게 말했다. “본부정자말필의(本不正者末必倚, 근본이 바르지 못한 자는 그 마지막이 반드시 기울어진다).” 경차는 ‘본(本)’은 놓치고 ‘말(末)’만 잡았으니 덕을 수양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보통 사람이 넘보게 하라.
 사람마다 교양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능력 또한 같지 않다. 당신이 고상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떤 이치에 관해 깊이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당신과 똑같길 바란다면 이는 억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먼저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역효과만 불러오는 일이 없다.
 공자 시대에 노(魯)나라는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풀기 위해 한 가지 규정을 두었다. 다른 나라에서 노비가 된 노나라 사람을 선의로 해방시켜주면 국고에서 그 비용을 돌려준다는 규정이었다. 어느 날 자공(子貢)이 노나라 사람을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도 국고에게 지급하는 돈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공자가 이를 듣고 비난하며 말했다. “자공이 틀렸다! 성인의 일은 풍속도 바꾸어 놓으니 그 교화의 힘이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에게까지 널리 전해진다. 앞으로 노나라 사람은 더 이상 기꺼이 노비를 해방시키려 들지 않을 것이다.”
 자공이 국고의 비용을 받지 않는다고 노나라 사람이 더 이상 노비를 해방시켜주지 않을까? 사람의 심리란 보통 적은 대가를 치르고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다면 선의를 선뜻 실천하기 어렵다. 자공은 명망 높은 인사이니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행동을 그와 비교하게 될 텐데, 만일 그가 노비를 해방시키고도 국고의 지원금을 받지 않았는데 자신은 받는다면 자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상하지 못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자비를 들여 동포를 노비에서 해방시키는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은 전체적인 효과에서 생각해야 한다. 만일 보통 사람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면 이는 자신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모두가 기꺼이 동참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능히 덕을 닦는다 할 것이다.

 

- [왼손에는 명상록, 오른손에는 도덕경을 들어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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