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의 소리 - 개정판 최인훈 전집 9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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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진정한 숙고의 힘으로부터 제기된 창조적 물음과 사색의 과정을 통해서만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그것’[존재]을 알게 되며, 그것을 자신의 진리 속에서 참답게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숙고로 인해 앞으로 도래할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가 존재에 귀속하면서도 존재자들 속에서는 낯선 자로 머물게 되는 그런 ‘사이’(Zwischen)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근대의 근본과정을 ‘세계를 상으로 정복하는 과정’이라 정의했을 때, 그리하여 출현하게 된 근대 학문의 전개를 ‘세계관의 논쟁’을 둘러싼 존재자의 ‘결단’의 과정으로 정립했을 때, 역설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시인의 언어였다. 기술(techne)의 미시화를 통해 개별 존재에게 표상되는 세계는, ‘언제라도 철저히 계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의 가시화가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계산할 수 없는 그것’이 되고 만다. 표상되지 않는 공간인 동시에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열린 터전’이기도 한 이 그림자. 이 그림자를 사색하는 인간, 그리하여 광기의 언어를 실어나르는 시인(횔덜린)이야말로 하이데거에게는 근대시의 탄생을 알리는 존재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러나 동시에, 저 ‘알 수 없음’과 ‘볼 수 없음’의 무기력 그 자체가 대도시 체험으로부터 촉발된 근대시의 출발이기도 했다. 서정시의 불가능성을 노래하는 최후의 서정시. 악취, 소음, 난투가 폐허처럼 쌓여가는 길목에서 판에 박힌 언어를 토해내는 사람 또한, 아니 이 사람이야말로, 파국의 징후가 끝없이 쌓여가는 근대세계의 종말과 구원을 동시에 낚아채는 시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세계의 인식 불가능성과 시인의 사명, 정치와 일상, 역사와 현실, 파국과 구원 사이에서 내내 서성이며, (세계를)쓰면서 (세계를)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달에서 지구를 본 육체의 눈만한 의식의 눈이 있다면. 지구는 한 줄의 시가 되리라. 지구는 말이 되리라. 지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눈이 있다면 둥근 슬픔의 그림자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들리는 건 소리요, 나오느니 비명 뿐인 세계의 밤. 「총독의 소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이 이 세계의 비밀같은 사실을 누설하는 ‘조선총독부지하부’의 방송의 장광설과, 그것을 듣고 난 후 자신이 발붙인 현실의 어찌할 수 없음을 떠올리며 쓰기를 예비하는 과정에 대한 소설로 읽힌다. 세계를 단숨에 독해해버리는 총독의 소리와, 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을 때 ‘이 도시를 바라다보면서 오래오래 서있는’ 시인이 떠올리는 파국의 상황으로 구성된 이 (소설 같지 않은)소설은 공히 저 ‘계산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해석 욕망과 눈 앞에 보이는 해독불가능한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자체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아는 것이다. 󰡔구운몽󰡕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방송은 ‘세계상’간의 투쟁에서 소외된 개인을 그리는 장치로 기능해왔다. 독고민은 자신을 각하로 지목하는 혁명군과 정부군의 방송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도망가기만을 반복했고, 독고준은 ‘그 해 여름’을 찾아가는 의식 속에서 방송을 듣지만 이내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태풍󰡕 이후에는,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저 수다스런 방송이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진실과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시인에게만 들리는 이 비밀의 방송과 현실사이에는 여전히 큰 괴리가 존재한다. 파국의 진실을 듣고, 처음에 시인이 내밷는 것은 다만 ‘아구구아구구아구구구아구구구구. 비명’이다.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총독의 소리」에서 방송을 듣는 시인은 이미 쓰고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들리는 방송에 대해서 이렇다 할 평가나 대응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이 파국의 상황을 구원의 순간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더한 파국의 순간을 요청하고 있다.

 

밤이여 익어라. 밤이여 익어라. 땅이 썩고 눈이 먹물처럼 흐리도록 밤아 익어라. 마지막 한마디를 어느 시인이 쓰는 순간에도 지구는 가라앉지 않는다. 밤은 더 익기를 원한다. (중략) 더 많은 재앙을. 풍성한 재앙을 (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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