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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역사 하얀 이론 -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ㅣ 한길신인문총서 18
이경원 지음 / 한길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1.
로버트 영이 맑시즘을 중심으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계보와 실천적 함의를 재구성하려고 했다면(<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이경원은 제3세계 민족주의를 그 중심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 모두 서구 아카데미즘의 문법 안으로 경사되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저항적 실천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해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탈환을 위한 방법과 연대의 가능성을 각각 다른 곳에 걸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경원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저항담론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어색한 결합’을 꼽는다. 계급과 민족을 ‘이론적 허구’로 치부하는 풍토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서구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경원은 ‘아직도 물질과 정신의 탈식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과도기’로 규정된 현재의 상황에서, 제3세계 민족주의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 안에서 이 책은 ‘탈식민주의’의 계보를 흑인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구라는 저항의 대상은 점차 선연해지고, 흑인 민족주의, 범아프리카주의, 네그리튀르와 같은 저항적 실천과 이론을 주창했던 이들의 이론적 지반이 되짚어진다.
여기서 저자가 가장 힘주어 설명하는 이론가는 역시 ‘파농’인데, 파농을 둘러싼 연구경향의 변화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이론적 모순을 가속화하는 기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연구의 경향이란, ‘하나는 1960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미국의 신좌파, 흑인 과격단체에서 주창한 ‘고전적 파농주의’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이후에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탈식민주의·문화연구 등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비판적 파농주의’다.’(184) 여기서 고전적 파농주의는 오로지 마르크스적 파농만 부각시켜왔고 비판적 파농주의는 프로이트적 파농에 주목한다. 호미 바바를 필두로 하는 ‘비판적 파농주의’는 결국 투쟁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적 파농은 점차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정신분석학과 탈구조주의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비판적 파농주의’는 서구이론 속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위와 같은 이경원의 논지 또한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의 말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도하는 온갖 이론의 향연이 우리의 비판의식을 혼미케 하며 피아의 식별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 특유의 완고한 저항의지를 내장한 민족주의가 역설적으로 다시 요청된다면, 도대체 그 적은 누구인가. 그가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그것은 문화다원주의, 초민족주의, 세계화, 자본화 등으로 일컬어지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과연 ‘민족주의를 시대착오적 골동품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서구의 전략이고 문화제국주의의 결과인 것일까. 이경원이 한국 내부의 바바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들은 대개 임지현과 같은 민족주의 비판론자들이다. 그의 도식대로라면, 내부 파시즘과 같은 논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제국주의의 음모를 무비판적으로 수용·내면화한 결과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논리는 자본화에 뒤따르는 대규모 이주, 국가의 제국적 통치기술 학습, 내부 하위주체에 대한 제국주의적 이분법과 같은, 말하자면 제3세계 내부의 제국주의적 열망에 대한 반성의 산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서구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즉 제1세계의 자기반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같은 논의가 대규모로 발생하게 된 원인에는 이미 준제국적 위치에 도달한 한국 내부의 현실적 징후와 증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민족주의가 제국 질서에 대항하는 저항담론이 될 수 있는가. 아니, 한국은 여전히 제3세계의 범주 안에서 파악될 수 있는가.
또한, 이 책이 설정한 제1세계와 그에 대립하는 제2세계, 제3세계라는 구도가 어느 정도의 현실적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여전히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대립에 기초하고 있는 이러한 구도는 제3세계의 저항의 산물인 탈식민주의가 ‘지배-내-구조화’ 되면서 발생되는 또 다른 지적 제국주의의 반복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여기서 하나의 전제는 모든 ‘‘타자에 관한’ 또는 ‘타자를 위한’ 재현은 결국 주체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로부터 전유된 탈식민주의 또한 주체중심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자생적으로 발생했던 저항적 탈식민주의를 제3세계가 탈환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이 주체의 이동이 저항의 공간을 산출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논리가 가지고 있는 함정 즉, 각 사회 내부 혹은 국가 간의 역학관계나 대립의 구도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책에서 제3세계 민족주의 혹은 민족문학의 연대를 주창할 때, 그 범위가 모호해지거나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아마 그 제3세계라는 범주를 한·중·일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 끼워 넣으려고 할 때에 생기는 이물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현재 상황과 흑인의 저항 민족주의를 겹쳐 저항의 대상으로 서구를 지목하는 것이 다소 어색해지거나, 나이브한 것이 되고 마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물론 이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통째로 생략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큰 틀에서 설명하고 있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계보학은 한국학 연구, 혹은 실천적 탈식민주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해준다. 아프리카나 알제리와 같은 곳과는 달리 한국에서 탈식민주의는 지속적으로 저항해야 할 대상이 이미 사라진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또한 그것은 이미 국가 간 협의를 통한 정치적 해소 이후 식민지 유산의 청산, 심정적 증오와 같은 형태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달리 말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처단과 저항이 이미 차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탈식민적 실천이 내부자(협력자)에 대한 고발이나 처단의 형태로 대리보충된 것은 아닐까. 파농의 말대로, 폭력이 피식민자를 주체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그러한 계기가 말소되어 버린 상황에서의 탈식민주의란 어떤 모습인가.
다른 한편, 탈식민주의의 서구적 전유 이후 본격화된 식민지 연구 혹은 한국학 연구의 궤적과 전망도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문제이다. 파농 이후의 서구에 의한 포스트콜로니얼 연구의 포식은,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어떤 면에서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일환이었던 탈식민주의를 언어의 유희로 변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혹은 보다 정교해지는 이론적 기반과 서구적 인식론과 철학적 계보에 기반을 둔 아카데미즘으로의 포섭이 한국학의 한계를 규정짓거나 구미에 맞는 성과만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것은 90년대 이후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채,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로의 방향전환을 맞았던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과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저항사 이후 탄생과 기원을 문제 삼는 근대성 연구, 지배자의 언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권력 분석 등으로 논제화 된 식민지 연구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