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최인훈 전집 5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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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야기’ 충동을 언어를 통해 실어 나르던 ‘서사시적 형식’이 근대에 주도적인 양식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명백한 원인을, ‘경험의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징후를 전쟁(1차 세계대전)에서 찾았던 사람은 벤야민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지(陣地)전·인플레이션·물량전·권력자를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수많은 전쟁에 대한 ‘책’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온 기존의 ‘이야기’를 대체해버렸으며, 그것이 인간의 전략·경제·육체·도덕적 경험을 박탈해버렸다. 그러자 진리의 서사적인 면인 ‘지혜’는 더 이상 전달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그 자리를 ‘정보’가 대신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과정의 끝자락에는 ‘소설의 발흥’이라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인쇄술에 기반한 ‘책’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경험을 전달하는 지혜의 총화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독한 개인의 묘사로 경사된다. 만약, 우리가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오토메나크’의 고민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서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끝내 누설하지 못한 ‘비밀’과, 그 비밀을 만들어낸 ‘묻혀버린 앎’이란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앎이 간신히 붙잡은 세계의 전체상(혹은 역사)은 어째서 거부할 길 없는 자연현상으로 명명되어 있는가. 이 글은 위와 같은 몇 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씌어졌으며, 그 물음의 발본적인 해명보다는 차후 독서를 위한 최인훈 소설의 징후들을 지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을 미리 밝혀둔다.

주지하다시피, 󰡔태풍󰡕의 중심적인 서사는 ‘오토메나크’라는 애로크 출신 나파유군 장교의 비밀스런 앎과, 그에 뒤따르는 고뇌와 선택에 집중되어 있다. 뒷배경을 대강 스케치 해보자면, 그는 친나파유주의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애로크의)독립 운동이 ‘완전히 땅 밑으로 숨어버린 시대’에 대학에서 ‘나파유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이와히 습격’을 통해 ‘정신적인 나파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인물이다. 또한 근엄한 군인의 몸가짐을 ‘절대 안전’의 의장으로 생각하며, 이데올로기라는 ‘제2의 혈액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그 이데올로기란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과 보수주의를 한데 묶은’ ‘파시즘(혹은 그보다 더 자주 언급되는 아시아 공동체의 사상)’을 말한다.

여기서 그가 고전 ‘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는 자주 눈앞에 펼쳐진 어떤 현실과 그 전체상을 읽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읽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카르노스가 감금되어 있는 저택을 본 기분을 ‘어쩐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그 저택의 미술품 진열실을 보고 ‘니브리타 문학의 여러 페이지’를 떠올린다. 나파유 본국과 식민지인 애로크의 정치적 불평자들에게 복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키다다 키타나트의 󰡔신국의 이념󰡕이 장황하게 설명되고, 며칠씩 늦게 도착되는 신문과 󰡔아이세노딘에서의 니브리타의 식민통치󰡕 등과 같은 책을 틈틈이 읽는다. 그런데 위에서 열거한 그의 독서는 세계를 해석하는 틀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해석되어 있는 것으로, 그 위에 다른 해석을 가할 수 없도록 한다. 이를테면 총통의 언어, 󰡔신국의 이념󰡕, 며칠씩 밀려와 거기에 적힌 모든 일들이 딴 세상 일처럼 느껴지는 신문은 이미 공개되어버린 앎의 목록들이며, 그렇게 구축된 세계란 ‘정돈된 세계’이므로 해석이 들어설 자리란 없다.

이렇게 오토메나크가 이미 소유한 책과 언어를 ‘드러난 앎’이라고 명명해 본다면, 그 반대편에 ‘감추어진 앎’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마야카의 말, 비밀문서, 진실의 소리 등이다. 이 앎의 뭉치들은 예의 그 ‘정돈된 세계’에 균열을 내며,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 고뇌의 종자가 된다. 물론 이는 적들의 소리이며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공간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토메나크에게 어떤 실질적인 체험의 형태로 인식된다. 특히 비밀창고 속에서 찾아낸 비밀문서, 보물, 아편 등은 그에게 역사 그 자체로 인지되고 있다. 아만다의 방이 어슴푸레 보이는 이 비밀의 공간 속에서 발견한 문서더미를 발견한 그는 “역사라고 하는 물건이 홀연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손에 총을 들고 주머니에 돈과 아편을 감추고 나타났다.”(119)고 생각하며, 한없이 미미하게만 느껴지던 자신이 ‘어느 모서리를 붙’들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문서 속에서 찾아낸 아이세노딘 남녀들의 수많은 사진들은 그들의 ‘생생한 인생’을 묘사해주며, 그 얼굴들 속에서 그는 ‘애로크’의 드러나지 않았던 반쪽의 얼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거기서 지난 백년 동안의 참말 역사를 발견했다는 황홀감과 절망 속에서 급기야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내가 그놈의 시니, 소설이니 하는 것 말고, 정치학이나 그런 것을 대학에서 택했다면 이런 사실을 알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125)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된 세계의 전체상은 여전히 전달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비밀스런 앎들은 외설스러운 것이어서, 이 감추어진 것들을 가로막음으로써만 가짜 나침반으로 항해하는 배를 표류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아도르노가 제시한 오디세우스의 비유를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달되지 않음 혹은 전달될 수 없음이라는 비밀의 근원적 아포리아이다. 저 드러나지 않은 지식은 세계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을 것이다.(어쩌면 최인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 이르러 이 소설에서 바다가 세계로, 태풍이 역사(의 국면으)로 환유되어 나타나는 사정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태풍이 일기 전의 약간 뜸한, 어떤 고요함의 시간’, 그러니까 전쟁기이지만 모두가 전쟁 중은 아닌, 그러나 거의 모두가 전쟁 중이라고 생각하는, 이 파국 직전의 시간이야말로 최인훈이 반복해서 돌아가야 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썼지만 책임은 못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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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2011-10-05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까지 써놓고 책임은 못 지겠다고?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