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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ㅣ 대담 시리즈 2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1년 11월
평점 :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무엇인가? 사실 참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렇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이나, 질문에 답하는 철학자들이나,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아직도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서양은 '이성적, 분석적...이다', 동양은 '직관적, 감성적...이다.' 등등의 외우기 편한 답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머리만 복잡해질 것이다. 그리고, 왜 이 똑똑한 철학자들이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인가 하고, 내심 화를 낼지도 모른다.
서양·동양, 남성·여성 등으로 편가르기하고, 각각에 그것들만의 본성을 찾아 못박아두려는 것은 사람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향일 것이다. 나 또한 몇 년 전까지는 반성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서양과 동양은 .....점에서 다르다'를 기정사실처럼 생각하고, 말해왔었다. 세계를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할 수 있고,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서로 대비되는 속성이 있다 생각했었다. 문제라면, 어렴풋이 잡혀오는 그 속성에 정확한 명칭을 부여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동양과 서양에 대한 이분법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그런 내게 같이 식사중이시던 교수님이 서양 안에도 얼마나 다양한 철학이 있고, 동양 안에도 얼마나 다양한 철학이 있는데, 또 그것들 사이에는 서로 비슷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동양은 어떻고, 서양은 어떻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하셨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서양'과 '동양'이라는 명칭이 있어서, 우리는 그 명칭에 부합하는 내용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큰 것 같다. 김용석, 이승환 두 철학자들의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이들 역시, 이러한 혼돈을 버리지도, 지키지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해명할 필요성이 있어서일 테고,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학자로서는 대답하기 난처할 정도로 지지할 수 없는 구분이여서일 것이다. 그래서, 둘은 논의 진행상 나름대로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을 갈라놓고도, 그것을 정말로 서양만의 서양적인 것, 동양만의 동양적인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서양'이라는 것, '동양'이라는 것, 그 명칭을 둘러싸고 있는 수식어들은 거의 대부분 허상일 뿐이다. 사실, 똑같이 서양이라 부르는 것 속에서 그리스, 로마의 신과 기독교의 신은 너무나 다르며, 합리론과 경험론, 현대 프랑스 철학 등은 서로 너무나 달라 싸잡아 부를 수가 없다. 또한, 지금 '동양'이라 부르는 것 안에도, 유교와 불교의 차이, 장자와 공자의 차이는 극명하다. 다시 말해, '서양'을 '이성적'이라고 지칭한다면, 한편으로 서양 속에서 '반이성적'이였던 문화, 철학, 사상들이 줄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외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에는, 차라리 편가르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이 이 책 속에서 서양이 무엇이며, 동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결과를 갖기 보다는 그러한 편가르기 자체를 의심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책 말미의 두 철학자가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이러한 내 바램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내용을 떠나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대화'의 시도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해답' 보다는 '풀이 과정'이 중요한 것이 철학이다. 현재 우리의 학문 풍토는 일방통행만 있는 것 같다. 학술지나 발표회장에서 논문을 발표하면, 학자는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갈 뿐이다. '대화'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화란 자칫 자신의 치부를 보일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이다.
이 책의 대화는 솔직히 100점짜리는 아니다. 상당히 우왕좌왕하는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이 두 철학자에게 그 탓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대화하는 법을 모르고 있으며, 배울 기회, 관찰할 기회 조차 없었는지, 지성인들이 그동안 얼마나 서로 간에 담 쌓고 지냈는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