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수학을 무지 싫어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학 선생님은 우리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혼자 열심히 칠판에 문제를 푸시고는 알았냐? 물어보시고

몰라요~~하고 우리가 대답하면 왜 몰라? 하고 칠판을 지워버리면 끝인  그런 분이셨다.


2학년 때 수학선생님은 안타깝게도 1학년 때 그 분이셨고.......


3학년 때는 여선생님이셨는데 우리 담임이셨고, 이 분은 정말 열심히 가르쳐주시고 모르겠다는 아이가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주시는 분이셨다.

3학년 때야 비로소 수학도 조금은 재미있네? 하고 생각해봤지만, 이미 수학혐오증에 걸려버린 나를 치유하기에는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지금도 숫자가 많이 연관된 일이면 몸속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곤 하는 나.......


그런 나에게, 숫자가, 수식이, 기호가

아름답고 따뜻한 것으로 다가오게 만든 책. <박사가 사랑한 수식>.




주인공 "박사"는 수학자인데, 17년 전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뇌의 기억기능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다.


예전 기억은 사고를 당한 17년 전에 멈춰있고, 새로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마치 머릿속에 80분짜리 비디오테이프가 들어있어서 새로운 것을 녹화하면 이전에 녹화했던 것이 지워져 버리는 것처럼.......

매일 오는 파출부도 그에게는 매 번 새로운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고, 심지어 파출부가 시장에 갔다가 80분이 지나서 돌아오면 다시 처음 인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대신 그는 각종 숫자를 물어본다.  “자네 생일이 언제인가?”

“신발 치수는 몇인가?” 등등.

박사의 집에 10번째로 오게 된 파출부 ‘나’는 박사의 이런 모습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박사를 통해 수의 아름다움, 다정함,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

특히 ‘나’의 생일이 2월 20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박사가 대학 때 학장상으로 받은 자신의 시계 뒤에 새겨져 있는 숫자, 284와 220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일깨워 줄 때 어떤 수와 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깨닫고 내가 받은 감동이란.......

(어떤 관계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책 읽는 재미가 확 떨어질 수 있으니까.)


박사가 ‘나’의 열 살 난 아들을 처음 만나 머리 위가 평평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말 -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 을 통해서는 그렇게 싫어하기만 했던 기호중의 하나에 불과하던 루트가 그렇게 따스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박사의 양복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메모지가 클립으로 여기저기 고정되어 있다.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자신의 기억력을 보충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서 달아놓는 것이다.  무엇보다 잘 보이는 곳에는 다 닳아빠져 너덜너덜해진 메모지가 붙어있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그 메모를 읽고 절망에 흐느끼는 박사의 모습은 얼마나 안타까운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 읽을 것이 없어질 테니 여기서 그만.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나’와 그 아들 루트와 박사 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 가는지 꼭 읽고 확인해 보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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