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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예술의 향기 - 화폭에 담은 천재 여류화가
유비자 지음 / 기사임당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사임당은 본명이 아니고 아호이다.
원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의 아호 뜻은 평소 그녀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받들겠다는 뜻으로 사임당이라는 호를 지었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5딸중 가장 사랑받는 딸이 되었고 19세에 이원수에게 시집가고 그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홀로남은 홀어머니를 끔찍히도 받들고 살았다.
후에 사임당이 낳은 7남매 모두 어머니의 성정을 닮아 효심이 지극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학문에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게 된다.
사임당 역시 어릴적에 아버지를 통하여 학문을 배우고 성인이되어서는 남편인 이원수와 자유롭게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수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이토론에서 언제나 사임당이 앞서나가거나 남편을 설득하는 쪽이었을 만큼 조예가 깊었다.
안견의 그림을 독학하여 수묵화를 그렸고, 숙종임금은 사임당의 그림을 도화원에 명하여 필화하여 왕궁에 두고 감상을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5만원권 지폐의 초상이기도 한 사임당에 대하여 21세기 여성회에서 반대를 하며 유관순으로 하자는 주장도 제기 되었지만, 현재까지 5만원권 지폐의 초상으로 현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이나 언급되는 송시열은 이이의 모친인 신사임당을 극찬하며 자신의 문집에 소상히 소개를 했을 정도이며,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특히 그예술적 경지 시,서화는 여성들에게 찬사가 인색했던 조선시대에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하겠다.
신사임당의 태교가 상당히 인상깊었고, 그래서 이이같은 대학자가 탄생되었다는 점에 절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48세에 사망하기까지 개인적으로는 순탄지 않은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