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영천국민학교의 발령장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정체된 교사자리에 비해 지방은 좀 나은 편이었다.

강원도에 지원을 한후 꼭 2주일 후의 발령이니까 도시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도회지 생활에 젖은 나에 대한 어머님의 걱정을 뒤로 원주행 열차에 올랐다.

원주시에서 내려 다시 시외버스로 2시간 가량을 가서 비로서 아담하고 조용한 작은 건물을 발견했다.

내가 교장실에 막 들어섰을 때 지긋이 나이가 들어 보이시는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혹시 이번에 새로 오신------"

"------ 예------ 맞습니다.서울에서 온 이지훈이라고 합니다. 87년에 서울교대를 졸업했습니다."

"아이고 이거 정말 잘 오셨습니다. 마침 5학년에 한 반이 비어 있었는데, 그 자리를 좀 맡아 주셔야 겠습니다."

"예, 그러죠!"

교장선생님에게 여기서의 생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설레이는 가슴으로 5학년 2반으로 출석부를 가지고 들어갔다.

한 학년에 두반씩 40여명정도 서울에서 교생실습 때의,60명 콩나물 교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섰을때 80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갑자기 온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인사말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 반 -- 갑--- 습니다, 여러분"

"올--- 한-- 해 여러--분과 같이 생활할 이 지훈이라고 합니다."

겨우 한마디 끝내고 한숨을 돌렸다.

그때 왠 꼬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질문 있읍니더."

"뭐지요?"

"선생님 총각이시지예?"

"그건 왜 묻지요?"
"우리 이모가 처녀아입니꺼!"

교실의 아이들은 떠나갈 듯이 웃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들과의 생활은 나를 좀 더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분명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달랐다.

난 교과서에 나오는'곤충'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 아이들은 텔레비젼을 친구로 삼는 도시의 아이들과는 달리,자연을 벗으로 삼고 매일 자연을 벗으로 삼고 매일 자연속에서 생활을 하기에 언제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대가 대학 졸업 논문을 쓸 때  국민학교 상급생 설문 조사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부 좀 하지 않고 실컷 놀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곳 아이들에게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나는 아이들에게 청소를 자율로 맡겼다.

하고 싶은 사람이 남아서 하도록------.

처음에 내가 같이 하니까 반아이들은 다 남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꼭 남아서 했다.

이들 아이들 중 유달리 내 관심을 끄는 아이가 있었다.

'하 석'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인데, 매일 남아서 청소를 했다.

어딘지 모르게 이 아이는 아주 섬세한 데가 있는 것 같고,말도 별로 없고 자기의 맡은 일을 잘 해 내고 있었다.

꼭 계집아이 같다고나 할까?

첫월급을 받으면서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월급의 일부는 어머니께 보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썼다.

사실상 생활비도 얼마 들지 않았다.

여서서는 돈 쓸 데도 별로 없었으니까 --------------------.

자취를 한다지만,언제나 옆집 아주머니께서 밥을 해주시고 아이들이 옥수수랑,감자랑,떡, 부침 때로는 김치까지도 갖다 주었다.

정말,이곳 생활이 더없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때의 비뚤어진 내 마음이 서서히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얹제나 도시가 꿈이고 이상이었다.

이곳에서는 중학교가 없어, 읍이나 시로 나가야 하는 이른바'유학'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방학이 되어 도시에서 오는 아이들은 붙들고 밤새도록 궁금증으 들었고,때로는 내게 많이 묻곤 했다.

왠지 나는 아이들이 도시로 나가는 것이 싫었다.

깨끗한 아이들이 도시에 있는 나쁜 것들에게'오염'될 것 같아서였다.

아이들의 일기장을 읽으면서,그러한 생각이 더욱 더 짙어졌다.

아이들의 생활에서 제일 기쁜 것은 한 달에 한 번 어머니를 따라 읍내장을 구경하고 짜장면을 먹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짜장면이 맛이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생활이 1년 지났다.

어떻게나 시간이 잘 가는지-------

6학년 1반을  맡았다.

5학년 때의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석이도--------

여전히 나는 청소를 자율로 맡겼고, 훈이는 매일 청소를 했다.

4월이 될 무렵 교장 선생님께서 각 반마다 넓은 운동장에 화단을 갖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오셨다.

한 반을 시범으로 정해, 해 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나는 자진해서 우리반이 하겠다고 했다.

토요일 방과후 아이들에게 화단을 가꾸기로 했으니 좀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서른 명 남짓 남았는데 석이는 보이질 않았다.

예상과는 달리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오래 갔다.

'이럴 때 석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날 따라 햇볕은 왜 그리 따가운지!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나고 석이에 대한 원망이 갔다.

'매일 남던 녀석이 하필 이렇게 일손이 부족할 때----'

해가 어둑어둑 져 갈 무렵 겨우 마무리를 끝내고 허리를 폈다.

그 때 누군가가 내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석이였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 저하고 빨리 가세요!"

그 녀석은 내게 이유를 물을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끌었다.

무슨 급한 일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석이의 뒤를 같이 내달었다.

가면서 내 머리속에는 의아심과 함께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혹시 무슨 큰 사고라도  저지른 것 아닐까? 아니야 석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그렇다면 혹 석이의 어머니께서 편찮으신건-------'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석이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내 자취방이었다.

나는 석이를 바라보며,말문을 열려는 순간 석이가 방문을 열었다.

신문지에 덮인 조그만 밥상이 눈에 띄었다.

'왠 밥상일까?'

의아심과 함께 다시 석이를 바라 보았다.

"선생님! 실은 오늘 일 못 도와 드린 것 죄송합니다. 오늘 선생님 생신이라 콩밥하고,미역국,나물 반찬을 장만 하는라 늦었습니다.

밥과 반찬은 제가 아이들과,나물도 캐고 해서 만들고 미역국은 어머님께서 끓여 주셨습니다."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아이가 신문지를 펼쳤다.

정갈하게 담은 밥과 깔끔하게 보이는 나물 그리고------미역국

'어떻게 내 생일을 알았을까?"

이곳에 와서 생활하며 내 생일이 된 줄도 몰랐다 .

'나도 몰랐는데 어떻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저 나는 아이들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차갑게 얼었던 내 마음에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까지나 이 기분이 계속 갔으면 했다.

맞은 편 창문으로 석양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의 맑은 이술방울과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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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2009-07-3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승원 영화 '선생 김봉두' 가 약~~간... 떠오르는 군여..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