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구판절판


브라질의 조슈에 데 카스트로(전 FAO 이사회 의장)는 1952년에 이미 자신의 유명한 저서 '기아의 지리학'에서 이 '금기시되는 기아'를 언급했지. 그의 설명은 무척 흥미로워. 사람들이 기아의 실태를 아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다는 거야. 그래서 그 지식 위에 침묵의 외투를 걸친다는 거야. 오늘날 학교와 정부와 대다수 시민들도 이런 수치심을 가지고 있단다.-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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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동하의 평론집 몇 권을 읽고 쓴 것이다.

 

 

 

 

이동하는, 동업자 - '한 문학평론가의 역사 읽기'란 책에 보면, 이동하의 오랜 친구 - 홍정선의 말을 빌면, '이단아(異端兒)'이다.

http://www.sdjs.co.kr/read.php?num=21&quarterId=SD200603

홍정선의 말을 조금 더 가져다 쓰면, 이동하의 쓴 글들은(지나가는 길에 지적하자면, 왜 이동하'의'일까? '이동하'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자이겠지만, 그러나 가끔 평론가들의 문투는 저렇다. 그러니 단순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늘 정당한 注目을 받지 못했다. 그가 쓴 글의 상당수는 이 시대에 누구도 선뜻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하는 껄끄러운 문제들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관심과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그가 1990년대 말에 간행한『한 문학평론가의 역사읽기』가 그랬고, 이번에 펴낸 책 『한국문학 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나 역시나, 홍정선의 이런 평가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이동하의 용기에는 기꺼이 따뜻한 박수를 보낼 수 있지만, 그의 문제 제기가 적절하고 올바른 것인가에 관해서는 조금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동하는 이단아의 길을 걷는 것일까?

문학평론과 인생공부(1999, 새미)란 책에서,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이유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어떤 일을 신명나게 하다가도 여러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으면 그만두어 버리는 사람.>이 말을 다르게 표현해서, 다음과 같이 쓸 수도 있으리라:<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남들은 할 수 없는 일, 혹은 하지 않는 일일 때에만 신명을 느끼는 사람.> 이문열은 자신이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한다. 나도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331쪽)

(이 평론집 곳곳에서 이동하는 이문열에 대한 비판의 칼을 높게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문열.2라는 글에서는 유독 그와 이문열의 공통점에 주목해 비판적 시각을 거둔다. 흔히 말하는 동병상련이다. 그점을 탓할 필요는 없다. 동병상련만큼 자연스러운 연대가 어디 있으랴. 나와 같은 아픔과 슬픔을 가진 자에게 나 역시 너그럽다.) 남이 하지 않은 일에 흥미를 느끼는 자. 그가 바로 이동하이다. 그가 이단아라고 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의 성향,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하는 취미(!) 때문인 것이다.

계속해서 이동하의 말을 옮겨보자.

지난 80년대 후반기에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내가 하고 있었던 일은, 그 당시의 다른 평론가들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혹은 하지 않았던 일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하는 일이 그랬고, 진보적 기독교 사상을 논하는 일이 그랬다. 그랬기에, 나는 평론작업을 하면서 정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신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로 접어든 이후, 나에게는 더 이상 그런 종류의 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변해서, 나와 입장을 같이하는 평론가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기 때문이며, 진보적 기독교 사상의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이 변해서, 더 이상 그 사상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나는 더 이상 평론을 쓰는 일에서 신명을 느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신명을 느끼지 모르는 것인지는 모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 기독교 사상에 대한 논의는 현재에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기독교와 문학에 관해서 그의 관점의 변화는 있지만, 여전히, 신명은 아니더라도, 열성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2003년의 '한국소설과 기독교', 2005년에는 '한국현대소설과 종교의 관련 양상'이란 책을 거듭해서 내고 있다. 더불어, 뒤의 책 서문에 보면, 이동하는, 더 치열하게 집중적으로 이 문제(성서와 우리 소설의 관련 양상)에 임할 작정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나 더욱 철저해졌다. 2006년 간행한 '한국문학 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란 책에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우리 사회를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도, 우파의 길을 가야 한다고. 도덕성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우파의 길이 옳은 길이며, 좌파의 길은 그릇된 길이라고.

 이동하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온당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이러한 표현한 진상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파>라는 명칭 대신 <좌파> 혹은 <사회주의 지지자>라는 정확한 명칭을, <보수파>라는 명칭 대신 <우파> 혹은 <자본주의 지지자>라는 정확한 명칭을 보편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보수는 부정확하고 좌파/우파는 정확한 명칭이란 그의 생각에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진보>란 매력적인 말인데, 나로선 진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 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런 이유로 보수란 말이 덜 매력이라고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치는 사람을 이동하는 보수/우파/자본주의자라고 부른다. 최근 좌파 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했다는우파 이명박 정부는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치는가? 이제는 사그라졌다는 촛불 집회가 뚜렷하게 보여주듯이 경찰 권력을 앞세우지 않으면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이명박 정부의 리더쉽이(었고 앞으로더 더욱 그럴 것이다.)다. 즉, 우파 역시나 국가 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경찰국가의 틀이 아니면 유지하기 어려운 이 친자본, 기업 프랜들리라는 이명박 정권의 모습을 두고 이동하는 우파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은 이동하의 주장과 다르게 좌파다. 그 극점에 아나키스트들이 자리하겠지만, 이러한 극점은 모두 자본주의라는 폐허에서 생겨난 것들 - 공산주의, 사회주의 -과 거의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예수도, 역시나, 좌파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평등의 이념을 표나게 내세우는 자들을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래 나는 이동하의 주장에 조금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그는 매우 극우적이란 점에서, 가끔씩은 표나게 좌파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모순이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이동하의 몫일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점은 물론 자본주의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소중하단 점에서 이동하의 자본주의 사랑을 탓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문학이란 단지 현실을 온전히 지키기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평론가' 이동하가 잊지 않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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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주문한 책을 받아보니, 책을 찍은 날이 2001년 12월 10일이다. 책이 나왔단 소식을 듣고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서는, 2007년 2월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은 아니겠으나, 세월 참 빠르다.

강준만이란 속물(오해 마시라, 이 표현은 내 것이 아니라, 강준만 자신의 것이다)이 쓴 책들의 장점은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읽히는 책의 대부분은 빠르게 쓴 것들이다.  보라, 무협지(요사이엔 흔히 판타지라고 부른다고 한다만)란 것들이 쉽게 씌어지지 않았다면 빠르게 읽힐 수 있으랴.

강준만, 권성우 두 사람의 공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책 머리에서 권성우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강준만 한 사람의 것(물론, 강준만 자신의 말을 빌리면, 짜집기한 책이다. 무협지란 원래 짜집기해서 쓰는 책들이다.)이다. 강준만의 무협지를 술술 읽다가, 권성우가 그 책의 한 귀퉁이를 빌려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던, 남진우 비판[심미적 비평의 파탄]까지 내처 읽게 되었다.

폄하해 말하자면, 권성우(혹, 최근 세상을 시끄럽히며 유명하다는 권상우란 배우와 혼동하지 마시기 바란다)의 그 글은 치졸한 복수극이다. 물론, 복수란 원한을 앞세우며, 그 원한의 제공자는 그 글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야비'(오해 마시라, 물론 이 표현도 내것이 아니라 권성우의 것이다)한 남진우이다. 남진우가 쓴 글이 아닌, 남진우를 비판하는 권성우의 그 글은 남진우와 그 자신이 상대를 공격하며 사용한 '사적 원한'이라 부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니라고? '한 사람의 비평가가 자신의 모든 비평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악의적인 비판과 인신공격적 글쓰기에 맞서서 자신의 입장과 비평적 진성성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권성우 자신이 책 머리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악의적 비판과 인신공격적 글 쓰기에 맞서는 사람은 사적 원한을 품기 마련이다.

잘 아시겠지만,  복수란  무협지의 오랜 모티프다. 복수 없는 무협이 어찌 재미 있으랴. 그래 강준만의 일인 저작이어야 할 그 책에 권성우의 그 글이 실린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무협의 세계에서 복수란 본디 신성한 의무이다.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빼든 칼날이 지향해야 할 바다.  아무리 치졸해도 복수는 해야 한다. 그래 나는 그 치졸한 복수극의 주인공이 된 권성우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문학 권력에 분노하는 많은 문학인들이, 술자리(는 역시나 잘 아시겠지만, 무협의 세계다)에서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현실 세계에선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적 원한으로 지쳐가지만, 힘이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힘이 없는 자에게 세상은 공포다.

 '김현 10주기 심포지엄' 사건(책 184-186쪽)의 주인공 권성우는 그러므로 참으로 용감하다.(권성우의 첫번째 비평집인 '비평의 매혹'의 책머리에, 나를 비평가로 세워주 신(오타일 것이지만, 원래 책에는 주신이 아니라, 주 신이라고 되어 있다) 유종호 선생님과 고(故) 김현 선생님에게 대한 감사의 마음만은 따로 적어두고자 한다.는 대목이 있다. 김현에 대한 고마움을 김현 사후 10년에 그가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되갚음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니체의 말대로 스승보다 못한 제자는 스승을 모독하는 것이다. 김현에게 받은 몫을 권성우는 제대로 갚으려 한 것이다.) 본디 복수란 용감한 자의 몫이다.

내가 재미 있게 읽은 이 무협지(?)가 발간된 지 5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초판 1쇄 펴냄인 것 같다.(올해 내가 받아본 책이 초판본이니 말이다) 그말인즉, 이 책이 많이 읽히지는 못했다는 뜻. 유감스럽다. 그래 이 서툰 글을 써서, 다른 분들의 일독을 권해보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지적해두자.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며, 다르다라고 해야 할 것을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다.  중학생도 아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권성우는 이 글에서

남진우가 R을 조망하는 도덕적 태도는 김영하의 소설의 냉소적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열린 태도와 얼마나 틀린가!(이 문장에선 김현의 냄새가 난다.  사실 권성우의 문체는,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른 김현의 그것에서 빚진 바 많은 듯 싶다. 그러나 김현은 얼마나 틀린가라고 쓰지 않고, 얼마나 다른가라고 쓴다.)(272쪽)

그 글 다른 곳에서도 역시나 똑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 다르다고 해야 할 대목에서 틀리다고 했을까? 실력일까? 실수일까? 실수도 겹치면 실력으로 보이는 법이다.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는 남진우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문장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치졸한 복수극이란 말로 그의 글을 폄하한 것을 용서하시라.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권성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책 말미에 속물 강준만이 적어 놓은 글을 다시 읽는다.

나는 결코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겠다. 나는 내가 이 책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문학권력들께서도 제발이지 자기 성찰을 시도해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문학 권력과 거리가 한참 먼 나까지 나서서 자기 성찰을 할 이유는 없겠다. 그러나, 나 역시 속물인지라, 자기 성찰이란 말, 멈추지 않겠다는 말에 자꾸 눈이 간다. 하긴, 죽음이 늘 곁에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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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위한 엑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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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절판


개개의 간단한 요구에 대해 제도적인 대응이 마련될 때마다 새로운 종류의 빈민이나 빈곤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나타난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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