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는 불행한가 -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전 거창고 교장 전성은 교육 3부작 시리즈 1
전성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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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울 시장직을 걸고, 빠른 복지/바른 복지라는 낡은 수사법을 앞세워,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무상급식과 관련한 주민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그는 물러났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놀랍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대가로 돈을 주고 받았다는 검찰의 발표가 이어졌다. 곽 교육감은 며칠 뒤 기자 회견을 열고, 선의에서, 2억이란 돈을 박명기 교수에게 건냈다고 고백했다.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진보나 수구 매체를 가리지 않고, 언론에서는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질타와 공격을 펼쳤다. 전임 공정택 교육감이 가히 비리 백화점이라 할 만한 행태를 보여왔음에도 미적거렸던 것에 비하면 곽 교육감에 대한 언론의 이런, 융단 폭격식 보도 태도는 조금 낯간지럽다. (한겨레 기사 참고)  

피의 사실 유포라는 낡은 레파토리(이것은 범죄 행위라고 한다. 검찰(언론)은 그런데 이런 범죄 행위를 계속하고(부추기고) 있다)가 계속되는 것도 사실 조금 지겹다. '카더라' 통신사 기사를 제목으로 내 건 신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곳에서 '신(新)'이 아니라 '구(舊)' 의 냄새만 맡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분노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2억이란 돈은 보통 사람들에겐 큰, 아주 큰 돈이다. 곽 교육감(서울시 교육감은 보통 사람이 오르기 힘든 자리)이라 해도 그 돈을 선뜻 내주진 못했겠지만, 선의에서 그런 큰 돈을 주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박탈감이 '즉각적' '분노'로 터져나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노만으로 곽 교육감의 행위가 범죄냐 아니냐는 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곽 교육감이(나 그의 측근이) 후보를 매수했느냐는 문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앞으로 법정에서 이 점이 분명하게 밝혀지길 바란다.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 이야기의 서두치고는 너무 이야기가 지저분해졌다. 

전성은 선생이 쓴 이 책의 내용 전부는 전영창 교장선생님, 홍종만 교감선생님, 원경선 이사장님 세 분에게서 듣고 배운 것이라 한다. 

   
 

전영창 교장선생님에게서는 모든 아이들은 평등하다. 어떤 아이도 온 천하보다 귀하지 않은 아이는 없다는 것을 20년 동안 배웠고, 홍종만 교감선생님에게선 자율의 중요성을 10년 동안 배웠다. 그리고 나의 성서 선생님인 원경선 이사장님에게선 평화를 40년 동안 듣고 배웠다. 

여시아문(如是我問 : 불교 경전으로 듣고 본 것을 그대로 믿고 따라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평등, 귀함, 자율, 평화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의 앞머리에, 학교는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학교란 제도는 '도구'이자 '수단'이란 말이다. 그것은 망치나 톱과 같다. 학교의 불행은 바로,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책의 제목은 누가 붙인 것일까? 책은 어렵지 않게 읽히고,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남겨주고 있지만,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왜 학교는 불행한가'라는 제목은 조금 이상하다. 불행이란 단어와 학교는 어울리지 않는다. 불행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아주 없지 않을 터이므로 학교와 불행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할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를 '행'이나 '불행'의 주어로 쓰기는 어렵다. 학교는 불행하다는 문장은 어색하다. 무정물인 학교란 단어에 행이나 불행이란 정서적 표현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바위는 불행한가'라는 말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바위'를 '교복'으로 바꾸어도, '학생증'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긴, '불행의 근거'라 이름붙인 이 리뷰의 엉터리 제목에도 이유가 없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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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트 -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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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7년 발렌타인 데이였다. 모처럼 올라간 서울 한귀퉁이에서, 지구가 태양을 열 번이나 돌 때까지 만나지 못했던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책 몇권을 얻어서 내려온 날이. 그 몇 권의 책 가운데에 링크가 있었다. 아마, 링크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버스트란 책의 저자 바라바시를 나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그 책을 내게 권해 준, 그리고 쥐어준 선배가 아니었다면.

그날, 동아시아란, 출판사 이름으론 떠올리기 어려운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선배의 모습은 내 기억 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쾌하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도록, 전화 한 통을 받은 것이, 그뒤 그와 나 사이의 인연의 전부였지만, 가끔 그의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 이 글을 쓰기 위해 동아시아 홈페이지에 가 보게 되었다.

동아시아 출판사 홈페이지에 그 선배는 우두머리 CEO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중 일부를 가져다 쓰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공부했다는데 그의 일본어는 명동에서 일본여자를 꼬시는 데만 쓰인다. 또 그의 일은 술 먹는 일이며 회사의 식구들에게 구박을 당하는 것이 그의 직책이다.-5년전-위의 글이 자극이 되었던 듯.. 남모르는 피나는 노력으로 배는 들어갔고, 손가방 대신 서류가방으로 바뀌었으며, 더이상 사채업자로 보는 이도 없다. 그러나 식구들에게 구박 당하는 것은 여전하다.. 

여전하다? 그렇다 그는 전과 같은 것이다. 술배가 나왔던 40대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그 배를 감춘(!) 지금이나 그는 내 기억 속에선 다르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그날, 선배는 내게 알라딘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찌 아느냐고 물었다. 각 온라인 서점마다 특징이 있는데, 그가 아는 나의 모습은 알라딘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유형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이다. 알라딘 고객의 유형에 관한 정보가 없는 나로선 그의 말을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튼, 용하게도 10년 가까이를 출판사 말아먹지 않고(이야기를 들으니 말아 먹긴 했었더란다. 운이 좋게도 다시금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켜낸 내공이 만만치 않은 듯 싶었다. 

최근 이 알라딘에서 추천마법사란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의 취향을 매일 분석하여 자신 있게 권해드리는 추천 상품!이란다. 흥,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곳 알라딘을 이용한 것이 꽤 오래 전 일이다. 주문 내역을 검색해 보니, 2000년 11월 1일에 처음 구매를 했다. 그리고 10년간 이곳 알라딘에서 책을 가끔씩 샀다. 올해만 계산해 보니 8월말까지 1,474,830원어치의 책을 샀다. 술값에는 훨씬 못미치는 액수겠지만(술값을 계산하는 술꾼이 어디 있으랴!) 적지 않은 돈을 이곳에서 뿌렸다. 그런데 내가 사들인 책의 정보를 분석해, 알라딘 추천 마법사란 서비스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혹스럽다. 

버스트란 책은 바로 이런 당혹스러움에 관한 책이다.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 데이터가 누적되어 있는 지금 인간의 보편적 행동을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전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언은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다. 23장 라이프리니어의 진실이란 장의 이야기는 특히 그런 당혹스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물론 바라바시는 당혹스러움이나 불편함을 건네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발견한(혹은 했다고 믿는) 새로운 사실들을 전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리라. 그 새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가 '버스트'다. 인간 행동에는 폭발성이란 패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패턴도 그런 현상과 닮아 있다. 주로 방학 때 몰아서 책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방학 내내 놀다가 방학이 끝날 쯤이 되서야 숙제를 몰아하는 아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이 마감을 앞두고서야 집중력을 발휘하곤 하지 않던가.

우리 속담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발전은 천 길 물속에 대한 탐사는 물론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탐사도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간 역학 연구라는 야심찬 계획(물론 이 계획은 팩션이란 형식을 통해 문학적 양식으로 전달된다)을 담고 있는 바라바시의 버스트란 책은 우리의 이런 속담이 늘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미래란 언제나 과거의 흔적일 뿐이니...바라바시가 그런 인간 행동의 그런 숨은 패턴을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일까? 도올의 논언한글역주를 읽다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子張問十世可知也.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2.23 자장이 여쭈었다."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 공자왈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고, 열 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본받아 덜고 보태고 한 바 있어 열세대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자가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백 세대의 일 일지라도 미리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도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장은 주나라에 대한 예찬의 한 표현인데,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세상일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항상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래의 예측은 명백한 상식적 함수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점쟁이에게 물어보고 상수나 참위로 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빤히 망할 짓만 하는 사람이 부지런히 점쟁이를 찾아 다닌다. 그런데 국가의 정치도 매일반이다. 

그러니까, 2천년도 훨씬 더 전에, 바라바시에 앞서서 공자께서, 인간 행동의 예측성을 미리 말씀해 두셨던 것이다. 물론 진지한 농담이다. 

출판계에는 책에 그래프가 하나 삽입될 때마다 독자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정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바라바시는 그의 전작인 링크에 여러번 출몰했던 그래프를 하나도 삽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용감하게도 트란실바니아 화가 보톤드 레세그흐의 작품 열다섯 장을 책에 실었다. 내 짤막한 독서 경험에 기대면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힌 책의 하나인 삼국지와 같은 책에서 흔히 써먹는 오래된 수법이다. 

그래프를 하나도 넣지 않은 탓에 이 책이 바라바시의 전작인 링크보다 더, 배나 잘 팔리게 될까? 나는 그것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책을 낸 내 선배는 그럴 것이라고 분명하게 믿겠지만 말이다. 

버스트란 책은 어렵지 않게 잘 읽혔다. 큰 장점이다. 그러나 '오토만'이란 단어는 이 책에서 출현 빈도가 높은 중요한 단어인데, 낯설다. 이 어휘는 Ottoman Empire란 영어식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일 터인데, 우리에겐 오스만 제국이란 널리 알려진 표현이 있다. '오스만'으로 써야 할 것이다. 

 뱀다리 : 이 엉터리 리뷰를 쓰고서 등록하기 단추를 누르고 보니, 저자가 버스트라고 부른 현상이 이 책의 리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라딘에 오늘까지 올라온 이 책의 리뷰는 모두 8편인데, 그 가운데 4편이 오늘 올라온 것들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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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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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우석훈을 '명랑' 좌파라고 불렀다.(정성일이 쓴, 우석훈의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발문의 제목은 '명랑' 좌파에게 건네는 전언이다.)

그러나 우석훈의 책 '괴물의 탄생'은 '호러경제학'의 끝(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다)답게, '명랑'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혹은 남자든 여자든, 우리 모두는 '이명박 경제'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공범자입니다.(272쪽)이란 그의 진술에, 가슴 아프지만, 나 역시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제학이란 분야에 무지한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가슴 아프단 말 이외에 별달리 덧붙일 것이 없지만, 책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명랑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닫는 글에 가서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폴 로머Paul M. Romer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1955년 생이니까 이제 마흔 살이 갓 넘었지만, 그의 '내생성장론(혹은 '신성장론')은 1990년대 이후 현대 경제학의 표준성장론이 로머의 모델에서 출발해 이렇게 저렇게 변형된 것들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것이다.(275쪽)

앞서 고백했듯 경제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폴 로머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1955년 생이라는데 왜 마흔을 갓 넘었다고 한 것일까? 이 책을 쓴 시점이 10년 전이거나, 아니면 1955년 생이란 정보가 잘못되었거나, 마흔을 갓 넘었다는 것이 틀린 것이리라.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아마도, 마흔은 쉰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왜 쉰이 마흔으로 바뀐 것일까? 물론 실수이리라. 280쪽의 책에서 한 두 곳 잘못이 없다면 어디 인간적일 수 있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실수는 무의식적인 데에서 비롯하듯, 쉰을 마흔으로 잘못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법 했다. 우석훈의 책 몇권을 요사이 읽어본 바로는 그의 글 가운데 그의 육체적인 나이가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는 대목이 여럿 눈에 띄었다. 폴 로머의 나이를 말하면서, 내 짐작으로는, 실상 그는 그의 육체적 나이를 대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막 20살이었던 80년대 초, 최승자의 시를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삼십 세란 시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시의 처음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왜 20살 그 풋풋한 나이에 삼십 세란 시에 유독 눈길을 주었을까?

최승자는 마흔이 되자 마흔이란 제목을 다시금 써서 우리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서른 살에 될 때는 벼랑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구릉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시인이 오십이 되어 다시 또 '오십 세'란 제목의 시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서른이 되자 시 읽기가 심드렁해졌고 마흔이 되자 시를 더는 읽지 않게 되었으므로...

나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석훈이 박노자에 대해 쓴 글의 마지막을 다시 읽어 보게 된다.

나이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좋은 자세는 아니지만, 하여간 박노자보다 먼저 뭔가 한다고 방방 뛰었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전부 접시 물에 코 박아야 한다.(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07쪽)

박노자보다도 나이로는 위이고 우석훈보다도 적은 나이가 아닌 나는, 방방 뛰지 않았단 이유로, 접시 물에 코 박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무튼, 나이 가지고 얘기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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