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동하의 평론집 몇 권을 읽고 쓴 것이다.

 

 

 

 

이동하는, 동업자 - '한 문학평론가의 역사 읽기'란 책에 보면, 이동하의 오랜 친구 - 홍정선의 말을 빌면, '이단아(異端兒)'이다.

http://www.sdjs.co.kr/read.php?num=21&quarterId=SD200603

홍정선의 말을 조금 더 가져다 쓰면, 이동하의 쓴 글들은(지나가는 길에 지적하자면, 왜 이동하'의'일까? '이동하'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자이겠지만, 그러나 가끔 평론가들의 문투는 저렇다. 그러니 단순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늘 정당한 注目을 받지 못했다. 그가 쓴 글의 상당수는 이 시대에 누구도 선뜻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하는 껄끄러운 문제들을 적절하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관심과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그가 1990년대 말에 간행한『한 문학평론가의 역사읽기』가 그랬고, 이번에 펴낸 책 『한국문학 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도 아마 그럴 것이다.

나 역시나, 홍정선의 이런 평가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이동하의 용기에는 기꺼이 따뜻한 박수를 보낼 수 있지만, 그의 문제 제기가 적절하고 올바른 것인가에 관해서는 조금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동하는 이단아의 길을 걷는 것일까?

문학평론과 인생공부(1999, 새미)란 책에서,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이유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어떤 일을 신명나게 하다가도 여러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으면 그만두어 버리는 사람.>이 말을 다르게 표현해서, 다음과 같이 쓸 수도 있으리라:<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남들은 할 수 없는 일, 혹은 하지 않는 일일 때에만 신명을 느끼는 사람.> 이문열은 자신이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한다. 나도 역시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331쪽)

(이 평론집 곳곳에서 이동하는 이문열에 대한 비판의 칼을 높게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문열.2라는 글에서는 유독 그와 이문열의 공통점에 주목해 비판적 시각을 거둔다. 흔히 말하는 동병상련이다. 그점을 탓할 필요는 없다. 동병상련만큼 자연스러운 연대가 어디 있으랴. 나와 같은 아픔과 슬픔을 가진 자에게 나 역시 너그럽다.) 남이 하지 않은 일에 흥미를 느끼는 자. 그가 바로 이동하이다. 그가 이단아라고 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의 성향,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하는 취미(!) 때문인 것이다.

계속해서 이동하의 말을 옮겨보자.

지난 80년대 후반기에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내가 하고 있었던 일은, 그 당시의 다른 평론가들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 혹은 하지 않았던 일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하는 일이 그랬고, 진보적 기독교 사상을 논하는 일이 그랬다. 그랬기에, 나는 평론작업을 하면서 정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신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로 접어든 이후, 나에게는 더 이상 그런 종류의 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변해서, 나와 입장을 같이하는 평론가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기 때문이며, 진보적 기독교 사상의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이 변해서, 더 이상 그 사상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나는 더 이상 평론을 쓰는 일에서 신명을 느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신명을 느끼지 모르는 것인지는 모르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 기독교 사상에 대한 논의는 현재에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기독교와 문학에 관해서 그의 관점의 변화는 있지만, 여전히, 신명은 아니더라도, 열성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2003년의 '한국소설과 기독교', 2005년에는 '한국현대소설과 종교의 관련 양상'이란 책을 거듭해서 내고 있다. 더불어, 뒤의 책 서문에 보면, 이동하는, 더 치열하게 집중적으로 이 문제(성서와 우리 소설의 관련 양상)에 임할 작정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나 더욱 철저해졌다. 2006년 간행한 '한국문학 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란 책에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우리 사회를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도, 우파의 길을 가야 한다고. 도덕성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우파의 길이 옳은 길이며, 좌파의 길은 그릇된 길이라고.

 이동하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온당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면, 이러한 표현한 진상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파>라는 명칭 대신 <좌파> 혹은 <사회주의 지지자>라는 정확한 명칭을, <보수파>라는 명칭 대신 <우파> 혹은 <자본주의 지지자>라는 정확한 명칭을 보편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보수는 부정확하고 좌파/우파는 정확한 명칭이란 그의 생각에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진보>란 매력적인 말인데, 나로선 진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 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런 이유로 보수란 말이 덜 매력이라고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치는 사람을 이동하는 보수/우파/자본주의자라고 부른다. 최근 좌파 정부를 몰아내고 집권했다는우파 이명박 정부는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구상을 펼치는가? 이제는 사그라졌다는 촛불 집회가 뚜렷하게 보여주듯이 경찰 권력을 앞세우지 않으면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이명박 정부의 리더쉽이(었고 앞으로더 더욱 그럴 것이다.)다. 즉, 우파 역시나 국가 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경찰국가의 틀이 아니면 유지하기 어려운 이 친자본, 기업 프랜들리라는 이명박 정권의 모습을 두고 이동하는 우파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을까?

국가권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은 이동하의 주장과 다르게 좌파다. 그 극점에 아나키스트들이 자리하겠지만, 이러한 극점은 모두 자본주의라는 폐허에서 생겨난 것들 - 공산주의, 사회주의 -과 거의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예수도, 역시나, 좌파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평등의 이념을 표나게 내세우는 자들을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래 나는 이동하의 주장에 조금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그는 매우 극우적이란 점에서, 가끔씩은 표나게 좌파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모순이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이동하의 몫일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점은 물론 자본주의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 소중하단 점에서 이동하의 자본주의 사랑을 탓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문학이란 단지 현실을 온전히 지키기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평론가' 이동하가 잊지 않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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