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주문한 책을 받아보니, 책을 찍은 날이 2001년 12월 10일이다. 책이 나왔단 소식을 듣고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서는, 2007년 2월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은 아니겠으나, 세월 참 빠르다.

강준만이란 속물(오해 마시라, 이 표현은 내 것이 아니라, 강준만 자신의 것이다)이 쓴 책들의 장점은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읽히는 책의 대부분은 빠르게 쓴 것들이다.  보라, 무협지(요사이엔 흔히 판타지라고 부른다고 한다만)란 것들이 쉽게 씌어지지 않았다면 빠르게 읽힐 수 있으랴.

강준만, 권성우 두 사람의 공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책 머리에서 권성우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강준만 한 사람의 것(물론, 강준만 자신의 말을 빌리면, 짜집기한 책이다. 무협지란 원래 짜집기해서 쓰는 책들이다.)이다. 강준만의 무협지를 술술 읽다가, 권성우가 그 책의 한 귀퉁이를 빌려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던, 남진우 비판[심미적 비평의 파탄]까지 내처 읽게 되었다.

폄하해 말하자면, 권성우(혹, 최근 세상을 시끄럽히며 유명하다는 권상우란 배우와 혼동하지 마시기 바란다)의 그 글은 치졸한 복수극이다. 물론, 복수란 원한을 앞세우며, 그 원한의 제공자는 그 글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야비'(오해 마시라, 물론 이 표현도 내것이 아니라 권성우의 것이다)한 남진우이다. 남진우가 쓴 글이 아닌, 남진우를 비판하는 권성우의 그 글은 남진우와 그 자신이 상대를 공격하며 사용한 '사적 원한'이라 부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니라고? '한 사람의 비평가가 자신의 모든 비평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악의적인 비판과 인신공격적 글쓰기에 맞서서 자신의 입장과 비평적 진성성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라고 권성우 자신이 책 머리말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분명 그렇다. 악의적 비판과 인신공격적 글 쓰기에 맞서는 사람은 사적 원한을 품기 마련이다.

잘 아시겠지만,  복수란  무협지의 오랜 모티프다. 복수 없는 무협이 어찌 재미 있으랴. 그래 강준만의 일인 저작이어야 할 그 책에 권성우의 그 글이 실린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무협의 세계에서 복수란 본디 신성한 의무이다.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빼든 칼날이 지향해야 할 바다.  아무리 치졸해도 복수는 해야 한다. 그래 나는 그 치졸한 복수극의 주인공이 된 권성우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문학 권력에 분노하는 많은 문학인들이, 술자리(는 역시나 잘 아시겠지만, 무협의 세계다)에서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현실 세계에선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적 원한으로 지쳐가지만, 힘이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힘이 없는 자에게 세상은 공포다.

 '김현 10주기 심포지엄' 사건(책 184-186쪽)의 주인공 권성우는 그러므로 참으로 용감하다.(권성우의 첫번째 비평집인 '비평의 매혹'의 책머리에, 나를 비평가로 세워주 신(오타일 것이지만, 원래 책에는 주신이 아니라, 주 신이라고 되어 있다) 유종호 선생님과 고(故) 김현 선생님에게 대한 감사의 마음만은 따로 적어두고자 한다.는 대목이 있다. 김현에 대한 고마움을 김현 사후 10년에 그가 그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되갚음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니체의 말대로 스승보다 못한 제자는 스승을 모독하는 것이다. 김현에게 받은 몫을 권성우는 제대로 갚으려 한 것이다.) 본디 복수란 용감한 자의 몫이다.

내가 재미 있게 읽은 이 무협지(?)가 발간된 지 5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초판 1쇄 펴냄인 것 같다.(올해 내가 받아본 책이 초판본이니 말이다) 그말인즉, 이 책이 많이 읽히지는 못했다는 뜻. 유감스럽다. 그래 이 서툰 글을 써서, 다른 분들의 일독을 권해보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지적해두자.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며, 다르다라고 해야 할 것을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다.  중학생도 아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권성우는 이 글에서

남진우가 R을 조망하는 도덕적 태도는 김영하의 소설의 냉소적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열린 태도와 얼마나 틀린가!(이 문장에선 김현의 냄새가 난다.  사실 권성우의 문체는,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른 김현의 그것에서 빚진 바 많은 듯 싶다. 그러나 김현은 얼마나 틀린가라고 쓰지 않고, 얼마나 다른가라고 쓴다.)(272쪽)

그 글 다른 곳에서도 역시나 똑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 다르다고 해야 할 대목에서 틀리다고 했을까? 실력일까? 실수일까? 실수도 겹치면 실력으로 보이는 법이다. 내가 나설 자리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는 남진우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문장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치졸한 복수극이란 말로 그의 글을 폄하한 것을 용서하시라.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권성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책 말미에 속물 강준만이 적어 놓은 글을 다시 읽는다.

나는 결코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겠다. 나는 내가 이 책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문학권력들께서도 제발이지 자기 성찰을 시도해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문학 권력과 거리가 한참 먼 나까지 나서서 자기 성찰을 할 이유는 없겠다. 그러나, 나 역시 속물인지라, 자기 성찰이란 말, 멈추지 않겠다는 말에 자꾸 눈이 간다. 하긴, 죽음이 늘 곁에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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