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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초정집(박제가(朴齊家)의 글을 모은 책의 이름이다. 초정(楚亭)은 그의 호이다. 제운(齊雲)은 그의 초명이라고 한다. 그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서문을 두고서, 박희병은 연암의 문학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연암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라고 평가한다.(358쪽)
법고창신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연암의 문학론은, 박희병의 평가를 그대로 옮기면, 그 이론 수준이 아주 높으며, 문예 창작 방법론을 둘러싸고 16세기 이래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열띤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를 갖는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도 한국학과 인문학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359쪽)
16세기 동아시아 문학 논쟁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는 박희병의 이러한 평가에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다. 물론, 연암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는 박희병의 이런 평가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란 데에는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진정한 '법고'는 창신적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창신은 '법고'와 연결됨을 보여준다.(336쪽)의 순환 논법은 비논리적인 것이어서 선뜻 더 생각을 끌고나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런 순환 논리는 '비약'이란 방법으로 탈출구를 마련하기 마련이지만, 이 비약의 성공 여부는 쉽게 가려지는 것이 그러나 아니다.
공작관(孔雀館은 박지원의 또다른 호다. 박지원은 35세 때인 1771년경부터 '연암'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 이전에는 '좌소산인' 무릉도인''공작관'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공작관이란 호는 32세 때인 1768년경부터 일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은 1768년 백탑 근처로 집을 옮겼으며 이 집 당호를 '공작관'이라고 짓고는 그것을 자호로 삼은 듯하다.385~386쪽) 글 모음 자서의 평설에서 박희병은
한국에서는 지금도 호가호위적 학문과 호가호위적 글쓰기가 횡행하고 있다. 연암이 말한 바와 다른 게 있다면 모방과 표절의 대상이 중국 책에서 서양 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데리다가 유행하면 데리다를 흉내 내서 말한다. 들뢰즈나 푸코를 베끼는 데 열심인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염암의 읽기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권위를 빌려서 한다. 그럼에도 자기는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린다. 모방은 아무리 잘해봐야 모방일 뿐, 창조는 아니다. 앵무새가 사람으로 화할 리가 있는가. 혹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모방은 모방이고 창조는 창조다. 둘은 본질상 다르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호가호위적 글쓰기를 하면서도 우쭐대는 사람은 부끄러움이란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387~378쪽)이라고 한국의 척박한 학문적 풍토에 대해 쓴소리를 내어 뱉고 있다.
우리 학문의 병적인 풍토는 박희병의 이러한 비판에서 물론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모방은 아무리 잘해봐야 모방일 뿐, 창조는 아니다. 앵무새가 사람으로 화할 리가 있는가. 혹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모방은 모방이고 창조는 창조다. 둘은 본질상 다르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박희병의 이야기는 앞서, 연암의 문학을 법고와 창신이란 틀로 설명하면서 이야기한 논법과 대조적이다. 거칠게 바꾸면 법고란 모방이고 창조와 창신은 그것이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법고는 창신이고 창신은 법고란 논법으로 연암은 크게 높이고, 모방과 창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논법으로 오늘날의 학적 풍토를 비판하는 시각은 어찌보면 모순이지 않을까?
박희병의 글은 연암의 글이 그러하듯이 법고와 창신 사이에 있다. 옛글을 꼼꼼하게 읽고 그것을 오늘의 글로 녹여내는 일이란, 고려가요 정석가에서 나오는 오랜 비유를 빌면, 옥으로 새긴 연꽃을 바위 위에 접을 붙인 뒤 꽃을 피우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