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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전집 ㅣ 시인백석 4
백석 지음, 송준 엮음 / 흰당나귀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오늘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희미한 오십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씿고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것으로 호젓한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ㆍ쨈 」과 도연명과 「라이넬ㆍ마리아ㆍ릴케」가 그러하듯이
- 힌 바람벽이 있어, (전집, 244-245쪽)
맹자를 읽다가, 백석의 시 「힌 바람벽이 있어 」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구절이 있어 옮겨 적는다.
孟子曰:「舜發於?畝之中,傅說?於版築之閒,膠??於魚鹽之中,管夷吾?於士,孫叔敖?於海,百里奚?於市。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必先苦其心志,勞其筋骨,餓其體膚,空乏其身,行拂亂其所?,所以動心忍性,曾益其所不能。人恒過,然後能改;困於心,衡於慮,而後作;徵於色,發於聲,而後?。入則無法家拂士,出則無敵國外患者,國恒亡。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告子下 35
하눌이 이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것이다
란 시인의 말은
하느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거대한 역사의 임무를 내려주시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에 더없는 고통을 안겨주시고, 그 육신의 근골을 더없이 수고롭게 하시며, 그 몸뚱이를 배고프게 하시며, 그 육신의 삶을 공핍하게 하신다는 것이다.(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 下 」, 통나무, 2012년, 709쪽)는 맹자의 말을 시적으로 변용한 듯 싶은 느낌을 준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두고,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라 말하는 이유도 맹자와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뜻 바로 그것일 것이다.
바야흐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스스로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 말하는 한 여성 정치인은 "준비된 미래냐 과거로 회귀냐 싸움"이냐는 선택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70년 유신의 딸이란 점을 크게 부정하지 못하는 처지에 '준비된 미래'라는 포장은 너무 과하단 느낌을 준다. '사람이 먼저다'라며 정권 교체를 주장하는 야당의 후보 역시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들진 못한다. 지금도 철탑 위에서 대한문 앞에서 고난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엔 더욱 그렇다.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이 겨울 넘치는 사랑과 슬픔이 그들과 함께 하길 감히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