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탄탄히 해줄수있는 독서법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이반 일리히가 쓴 책 가운데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가 있다. 소박한 실천지침처럼 느껴지는 예쁜 책이름이다. 그러나 책이름과 달리, 본문은 꽤 어렵다. 겨우 100쪽 남짓한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폈다를 되풀이하면서 읽었다. 

이 책은 혁명적인 메시지를 다루고 있지만 무척 얇다. 겨우 100쪽 남짓한 본문에서 ‘수송에 응용된 열역학의 역사’와 ‘교통’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현실에 물든 생각 방식을 깨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에 걸맞는 ‘논증’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책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주제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게 해주는 실마리쯤으로 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본문이 100쪽쯤 되는데 참고문헌이 16쪽이고, 옮긴이 해설이 28쪽이나 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는 않지만 배꼽이 지나치게 크긴 하다.

이 책 영어판 이름은 ≪에너지와 공평함Energy and Equity≫이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equity는 자연법에 따른 ‘정의正義’라는 뜻이기도 하다(justice according to natural law or right). 내용은 1970년대 후반(1975~1976) 멕시코 체르나비카의 ‘국제문화 자료센터(CIDOC)’에서 열린 세미나의 두 모임에서 있었던 토론을 이반 일리히가 요약한 것이다.

이반 일리히는 ‘에너지 위기’라는 말 자체를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너지 위기’라는 말은 ‘어떤 모순을 은폐하고 나아가 어떤 환상을 신성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너지란 사람이 만들어낸 ‘도구(예를 들면 모터)’를 노예처럼 써먹을 수 있는 연료를 말한다. 그 연료에는 전기나 화석연료가 다 포함된다. 이반 일리히가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에너지 위기라는 말은 에너지가 꼭 필요한 것일 때 위기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자동차가 꼭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휘발유가 모자랄지 모른다는 것이 걱정거리가 된다. 자동차가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휘발유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에너지 위기라는 말은 이처럼,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은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는, 휘발유가 없어 걱정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자동차를 덜 쓰거나 쓰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위기도 없다. 여기까지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생뚱맞기까지 할지 모른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논리가 그런 진부한 생각을 확 깨게 해준다.

더글라스 러미스가 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을 보면, 선진제국들이 전세계에 새로운 종교처럼 전파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거짓놀음이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은 무한하지가 않다. 서양 사람들이 잘 쓰는 비유로, 그것이 파이라고 하면 크기는 정해져 있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어 좀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면, 누군가는 적은 파이를 차지하거나 파이를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지금 가난한 나라가 ‘열심히만 하면’ 다 부자 나라가 된다는 말도 거짓임을 말해준다.

수송수단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없다. 우리는 벌써 그것을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지구에서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은 이미 ‘기어 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어마어마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 ‘결국’엔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내고 있다. 도로를 닦은 데 든 돈과 도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드는 돈,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 위해 드는 온갖 비용을 다 계산한다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빠르지 않을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자전거가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은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서 드러났다. 자전거 문화가 자동차 문화와 싸워 이겼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에서는 과잉산업화로 무장된 군대가, 자전거의 속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교훈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백하다. 에너지 고소비의 군대는 모든 민중을 파멸시킬 수 있다. 즉 그 방위의 대상이 되는 민중도, 또 그 공격의 대상이 되는 민중도 함께 파멸시키지만,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를 지키는 민중에게 군대의 위력이란 매우 제한적인 것이다. 베트남인이 전쟁에서 배운 것을 평화의 경제에도 적용할 것인가 아닌가, 그들에게 승리를 초래한 가치를 적극적으로 지키고자 할 것인가 아닌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또다른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다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운송 시스템에서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그래서 효율적이며 참으로 지속 가능한, 자전거와 같은 ‘자율적인 이동도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새로운 것(에너지)이라고 해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것은 지구의 내장을 꺼내 쓰는 일이다. 지구는 무한정 주는, ‘아낌없는 주는 나무’가 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생각보다 단순하고 쉬운 논리다. 에너지도 많이 쓰면 결국 없어지는 것이고, 모두가 부자가 될 수도 없는 것처럼, 모두가 무한 속도를 누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적당한 속도는 지구가 순환하면서 감당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속도다. 행복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 일리히 책을 덮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현실적인 실천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책 이름에 드러나듯이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작은 실천방법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잘 읽어 보면 그렇게 간단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쓴 또 다른 책들, ≪학교 없는 사회≫나 ≪성장을 멈춰라≫에서 다루는 혁명적인 이야기와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또는 생각해보는) 것이 해결책을 마련하는 시작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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