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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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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엔 참 여러 사연이 많다. 비단 학생들의 사정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얽힌 공동체다 보니, 어떤 사정은 듣고도 입을 닫아야 할 때도 있다. 입을 닫는 건 그 일을 외면한다는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사정일수록, 하지만 내가 섣불리 구원해줄 수 없는 일일 땐,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항상 대해왔던 것처럼, 아이들을 보듬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뇌전증을 앓는 친구가 그만 교실에서 수업 중에 발작을 해버린 일이 있었다. 다행히 누구 하나 크게 다친 일이 아니었다. 그 친구를 조퇴시킨 후 나와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약속했다. 우리 그냥 평소처럼 그 친구를 대하기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모른 척 연기를 잘 해주었다.

 

  무심한 척하는 위로라니.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섣부른 위로보다 더 큰 위력을 갖는다.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에서 홍주가 주고받은 위로에서 난 아이들의 무심한 위로를 떠올렸다. ‘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릴 때면, ‘홍주는 자기가 가장 아끼는 워크맨과 이어폰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방 한구석을 빌려주었다. ‘의 집에서 얹혀 사는 처지에 수치심을 느끼는 홍주를 위해 밖에서 홍주를 모른 척하며 다녔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용이’, <교분>국어 선생님모두 상처 입은 에게 무심한 척, 모른 척하면서 위로를 건내거나, 조용히 안아준다. 여섯 편의 단편 속 가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느낌은 작가님의 전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과 유사하다. 어질머리가 나도록 생각은 많지만, 입 밖으로 차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생각이 많을수록 상처는 깊어지지만, 또 속으로 울 수밖에 없는 사람. 여섯 편의 작품 속 가 그러한 사람인데, 그 안에서 또 나를 발견하고 위안을 얻는다. 이렇게 살아도 또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면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모른 척 위로에 많은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때론 그 모른 척이 너무 어설퍼서 웃음마저도 나올 때도 있지만. 그 다정함에 나마저도 외면했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된다. 내가 받은만큼 또 다시 나도 돌려줘야 한다. 나는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다 사연이 있겠죠.’, ‘지켜봅시다.’

 

  김병운 작가님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서평을 쓸 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딱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과 사람을 본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며 덤벼들거나, 섣불리 위로하거나, 또 조언한다는 것이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조금만 여유를 두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말 못할 사연이 있겠죠.’ 그리고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나기.

 

하지만 절대로 눈 감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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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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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학교서 하는 체육대회도 레크리에이션 업체에 외주를 맡긴다. 전문가들의 프로페셔널한 진행 하에 이뤄지다 보니 확실히 예전보다 더 흥겹고 즐거운 체육대회가 된 것 같다. 체육대회의 피날레는 모두가 흥겹게 춤을 추는 댄스 타임이 거의 확정적으로 정해져 있다. 요 몇 년간 그러지 않았는데, 올해는 당혹스럽게도 갑자기 담임 선생님들과 학급 아이들이 같이 춤을 추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당황해하는 나를 아이들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선생님은 춤 못 춰.’ 우리 반 익살꾼이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선생님 춤은 그냥 추는 거죠.’

 

그 유명한 조르바의 댄스부분을 읽었을 때, 난 올해 있었던 체육대회의 피날레를 떠올렸다. 아이들은 조르바만큼 훌륭한 멘토들이다. 또 이렇게 아이들에게 배웠다.

 

내가 춤을 못 추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교사지만 은근히 무대 공포증이 있다. 학생 시절에 농구 선수셨다가 체육 선생님이 되신 아버지도 내 몸짓을 보고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난, 계획되지 않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심각한 젬병이었다.

 

과거는 회한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각성을 방해한다. 미래는 미지의 불안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각성을 방해한다. 계획은 미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렇게 이렇게 할 것이라는 마음의 설계도를 구축하는 것이 계획인데, 이것이 잘 갖춰지지 않으면 나는 쉽게 불안에 빠지곤 했다. 내가 춤을 못 춘 건 몸은 손은 이렇게, 다리는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계획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조르바가 내게 알려준 것은 춤은 현재 흘러나오는 선율에 몸을 맡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현재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 때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우리는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르바가 외치는 자유의 본질이었다.


내년에는 꼭 아이들과 즐겁게 춤 추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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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3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입 전문학원에 다니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동료가 고고장에 가 본적이 없는 나를 끌다시피해서 고고장으로 데리고 갔다. 공부에 시달리던 스트레스 해소용이었던 셈인데, 당시 춤이라곤 처음이었던 내겐 그야말로 신세계였지요. 그때가 떠오르는 글입니다.

김구보 2025-11-30 18:00   좋아요 0 | URL
춤을 추는 몰입의 순간에 들어서게 되면 신세계에 빠진 느낌이죠. 소중한 추억이 담긴 댓글 감사합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오늘의 젊은 작가 26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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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거의 모든 언어에는 시제 표현이 있다. 어떤 언어에는 미래시제 표현은 없을지 몰라도, 거의 모든 언어에는 과거 시제 표현과 현재 시제 표현은 존재한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 과거와 현재의 길항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을 심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과거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 가버린 것이기에 물리적으로 실체가 없고, 다시 재현할 수 없으나, 과거의 망령은 현재의 를 끊임없이 맴돈다. 과거의 과오는 현재에의 각성을 방해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다.

 

과거에 실패한 인간은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을까. 그런 사례를 수도 없이 많이 봤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우리는 살아간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내면을 향하는 지독한 내성 발톱형 인간인 나도 잘 산다.

 

그것은 치열한 반성과 성찰로 수정된 과거를 현재에 반영하는 힘이 인간 누구나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정되어 재구성된 과거를 양심, 혹은 신념이라는 말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다. 인간의 양심과 신념 비교적 굳건한 물성을 가지고 있다. 양심과 신념을 방패삼아 밀고 나가면, 또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의 2장이 깊은 울림을 준다. 잘못된 과거로 인해 소실되어버린 김영우 감독의 영화를 공상표가 다시 쓰는 행위는, 잘못된 과거를 수정하여 현재에의 양심으로 삼아 현존하고자 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스스로 망쳐버렸다고 여겼던 과거가, 그래서 현재의 삶을 놓게 만들고 싶었던 과거가, 다시 살아가야 할 힘으로 전환되는, 지극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치열한 생존법이 여기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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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이스트
다카야마 마코토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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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임 교사 시절, 담임 반 아이 중 대뜸 자퇴를 하겠다는 아이가 있었다. 사정을 들으니 너무 안타까웠고, 또 그러기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먼저 속병이 나버린 건 나였다. 속을 끓이고 있는 내게 나이가 지긋한 부장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모든 아이들을 구할 수는 없어요. 각자 책임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다듬은 말처럼 각색되어 있지만 어쨌든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이를 붙잡으려 했던 마음이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게 함부로 사랑이라면서 자기 자신에 취했던 날들이 수치스러웠다. 여전히 나는 미숙한 인간이고, 이런 나를 미워하는 나는 당분간 나와 화해하기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을 공글렸다.

 

진짜 괜찮은 사랑은 양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충만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양자는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이 열등하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다.

 

동정을 사랑으로 믿는 쪽이 최악이다. 내가 상대를 구원하기 위해 상대는 열등한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일종의 폭력이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내가 다해줄게, 부담 갖지 마. . 초임 교사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사랑을 주고 헌신하는 내 모습에 취한 것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연차가 쌓일수록 거꾸로 아이들이 주는 사랑과 위안에 살 맛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의 화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역시 사랑을 잘못 배워버린 인간이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사랑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에게 완전히 취해버린,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에고이스트의 비극이다. 이걸 순애로 본다면, 그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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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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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과정에서 자신의 의사와 반대로 표현하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임에도 싫어’, ‘안 할래와 같은 거부 표현이 앞선다. 이 애가 왜 이러나 싶지만, 아이들의 반의어 표현은 그것을 원하지만 내-마음대로-결정하겠다는 일종의 결정권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아이들의 본심에 다가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


소설 속 에리카는 이 과정에 고착되어 버린 채 성인이 된 인물처럼 보인다. 십 년 전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불쌍한 여자 에리카. 하지만 그녀의 내심이 궁금했다. 정말 피학의 절정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건지.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 소설이지만, 영화를 먼저 본 시점에서 이 소설은 피아니스트의 친절한 안내서처럼 보였다. 아리송한 에리카의 내면을 집요하리만큼 임상적표현으로 낱낱이 해부한 소설이니까.


에리카의 행동은 미성숙한 아동기의 일종의 결정권 투쟁으로 보인다. 날 때려줘, 날 묶어줘. 정말 원한다기 보다는 이 사랑에서 결정권을 갖고 싶은 마음에서 한 일종의 유아기적 반의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발달과정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주고 가르쳐준-어머니의 착취와 가학적인 학대가 탈이 난 것처럼 보인다. 피학이 사랑과 연합되어버린 바람에 그녀는 정말 사랑을 잘못 배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리카가 한편으로-이렇게도 많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그녀가 참으로 안타깝지만- 몰두하는 일은 자해이다. 자해는 자신을 벌주면서 느끼는 가학의 쾌감과 자해의 피해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피학의 쾌감이 동시에 이뤄지는 행위다. 에리카는 가학과 피학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몸이 되어버렸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그렇게도 사람들이 떠받치고 숭상하는 예술에 있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예술을 매개로 하여 에리카를 착취한다. 추악한 착취의 이면을 모른 채 사람들은 에리카의 연주와 예술의 세계에 찬사를 보낸다.


참으로 읽기 힘들어서, 병렬독서를 명분 삼아 세 권의 다른 책을 읽고 다시 되돌아와서 완주했다. 집요하리만큼 한 인간의 심리를 임상적으로 파헤치는 소설인데 이게 참 읽기 동력을 얻기 힘든 구조다. 서사의 흥미를 동력으로 삼아 읽는 소설들이 있고, 그것을 버리더라도 미문의 음미를 동력으로 삼아 읽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 어느 것에도 속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리카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 듯한 작가님의 마음이 치유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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