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이스트
다카야마 마코토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임 교사 시절, 담임 반 아이 중 대뜸 자퇴를 하겠다는 아이가 있었다. 사정을 들으니 너무 안타까웠고, 또 그러기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먼저 속병이 나버린 건 나였다. 속을 끓이고 있는 내게 나이가 지긋한 부장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모든 아이들을 구할 수는 없어요. 각자 책임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다듬은 말처럼 각색되어 있지만 어쨌든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이를 붙잡으려 했던 마음이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한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게 함부로 사랑이라면서 자기 자신에 취했던 날들이 수치스러웠다. 여전히 나는 미숙한 인간이고, 이런 나를 미워하는 나는 당분간 나와 화해하기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을 공글렸다.

 

진짜 괜찮은 사랑은 양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충만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양자는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이 열등하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다.

 

동정을 사랑으로 믿는 쪽이 최악이다. 내가 상대를 구원하기 위해 상대는 열등한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일종의 폭력이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내가 다해줄게, 부담 갖지 마. . 초임 교사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사랑을 주고 헌신하는 내 모습에 취한 것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연차가 쌓일수록 거꾸로 아이들이 주는 사랑과 위안에 살 맛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의 화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역시 사랑을 잘못 배워버린 인간이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사랑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에게 완전히 취해버린,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에고이스트의 비극이다. 이걸 순애로 본다면, 그건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