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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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과정에서 자신의 의사와 반대로 표현하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임에도 싫어’, ‘안 할래와 같은 거부 표현이 앞선다. 이 애가 왜 이러나 싶지만, 아이들의 반의어 표현은 그것을 원하지만 내-마음대로-결정하겠다는 일종의 결정권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아이들의 본심에 다가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


소설 속 에리카는 이 과정에 고착되어 버린 채 성인이 된 인물처럼 보인다. 십 년 전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불쌍한 여자 에리카. 하지만 그녀의 내심이 궁금했다. 정말 피학의 절정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건지.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 소설이지만, 영화를 먼저 본 시점에서 이 소설은 피아니스트의 친절한 안내서처럼 보였다. 아리송한 에리카의 내면을 집요하리만큼 임상적표현으로 낱낱이 해부한 소설이니까.


에리카의 행동은 미성숙한 아동기의 일종의 결정권 투쟁으로 보인다. 날 때려줘, 날 묶어줘. 정말 원한다기 보다는 이 사랑에서 결정권을 갖고 싶은 마음에서 한 일종의 유아기적 반의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발달과정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주고 가르쳐준-어머니의 착취와 가학적인 학대가 탈이 난 것처럼 보인다. 피학이 사랑과 연합되어버린 바람에 그녀는 정말 사랑을 잘못 배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리카가 한편으로-이렇게도 많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그녀가 참으로 안타깝지만- 몰두하는 일은 자해이다. 자해는 자신을 벌주면서 느끼는 가학의 쾌감과 자해의 피해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피학의 쾌감이 동시에 이뤄지는 행위다. 에리카는 가학과 피학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몸이 되어버렸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그렇게도 사람들이 떠받치고 숭상하는 예술에 있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예술을 매개로 하여 에리카를 착취한다. 추악한 착취의 이면을 모른 채 사람들은 에리카의 연주와 예술의 세계에 찬사를 보낸다.


참으로 읽기 힘들어서, 병렬독서를 명분 삼아 세 권의 다른 책을 읽고 다시 되돌아와서 완주했다. 집요하리만큼 한 인간의 심리를 임상적으로 파헤치는 소설인데 이게 참 읽기 동력을 얻기 힘든 구조다. 서사의 흥미를 동력으로 삼아 읽는 소설들이 있고, 그것을 버리더라도 미문의 음미를 동력으로 삼아 읽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 어느 것에도 속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리카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 듯한 작가님의 마음이 치유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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