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에 영향을 주었음을 강조하는 것(그리고 전자의 해방적 요소들이 후자에도 다시 떠오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이 신자유주의를 다룬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두 번째 지점은, 신자유주의가 엘리트 중심의 정치 모델이라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 대중 및 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의 호소력을 어떻게 확산시켰는지도 고려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지점이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가 정치운동에서 시작하여 정치 질서로 나아가게 된 상황이 만들어지는 데에 국제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 P23
로널드 레이건은 자신의 정치적 십자군에 가담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를 규제의 족쇄에서 풀어내는 자유의 운동이라고 많은 미국인이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유야말로 모든 미국인의 생득권이라는 틀을 제시한 뒤, 사람들이 미국독립혁명을 위해 싸웠던 이유로 바로 그러한 자유의 추구였으며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한 것이었다고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레이건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해방적 언어를 20세기 말의 청중에게 먹히도록 부활시켰으며, 이렇게 자유주의를 부활시킨 것은 그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된 원인이기도 했다. - P21
내가 ‘자유주의‘ 앞에 ‘신(neo)‘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서 구별하고자 하는 대상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에서 변모하여 생겨난 현대 자유주의다. 이 현대 자유주의는 시장 메커니즘에서 루스벨트의 전임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용납할 수 있는 한도보다 휠씬 더 많은 정부개입을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다. 그래서 후버 대통령을 지지했던 정치가들은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자신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게 된다. 하지만 그 집단의 지식인들 중 많은 이가 보수주의라는 말의 주된 의미는 질서, 위계, 개인이 제도에 종속돼 있다는 것 등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그토록 찬미하는 혁신, 발명, 전복 등의 자유주의적인 정신과 반대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자유주의자라는 이름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한 목적에서 나타난 말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였던 셈이다. - P19
공산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또 한 가지 결과로서, 앞의 것만큼 자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동일한 것이 있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다른 곳에서도) 하나의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던 자본주의 엘리트와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 타협을 제거해버린 것이다.(중략) 공산주의의 전전이라는 유령 때문에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군사적 억제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미국을 포함한 선진 산업국의 자본주의 엘리트들은 계급적 적대자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타협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위협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할 만한 것이었다. - P26
공공 일자리를 위한 뉴딜정책의 신념은 아주 확고했기에, 예술가들까지도 일자리를 얻어 정부 건물 수백 채의 내부를 벽화로 채우게 된다. 지금도 미국의 공공건물들을 보면, 워싱턴 수도에 있는 내무부 건물의 큼직한 벽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 위치한 무수한 우체국 건물과 학교 건물을 비롯해 일터나 쉼터 가릴 것 없이 색감이 넘치고 사람의 시선을 확 붙잡는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뉴딜에서 기인한 것이다. - P44
1930년대에는 공산주의적 중앙 계획의 신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견학하기 위하여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았고, 여기에는 많은 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는 웨스트버저니아 휠링 출신 젊은 금형 기술자로서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에서 일하던 월터 루서(Walter Reuther)도 있었다. 루서는 10년 후 전미자동차노조의 위원장이 되며, 그 힘으로 미국의 복지국가(디트로이트협약도 포함)와 노동운동의 주된 설계자가 된다. - P63
러시아인들이 겪은 고통의 규모뿐만 아니라 그것을 묵묵히 영웅적으로 버텨 낸 태도는 전 세계에 깊은 감명을 남겼고, 이 덕분에 스탈린이 히틀러와의 거래 때문에 희생될 뻔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명성도 회복됐다.(중략)그 결과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공산당은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세력과 위치를 점하게 됐다. 1945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은 최대 정당이었으며, 그 당원의 숫자는 프랑스에서는 90만 명, 이탈리아에서는 180만 명에 달했다. - P67
공산주의와 종교적 신앙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취임)연설에는 그 어디에도 태프트와 그 동료들이 그토록 분노했던 관점에 동조하는 내용이 없었다. 즉 뉴딜은 사악한 것이며, 노동의 권력을 후퇴시켜야 하며, 정부의 경제 규제를 종식시켜야하며, 연방정부의 예산을 삭감하여 균형재정을 회복해야 하며, 19세기식 자유의 관념을 회복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수당이 된 민주당의 새로운 원내총무 린드 존슨 상원의원은 약간 볼멘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젠하워의 취임 연설은 "지난 20년간의 민주당의 여러 프로그램을 아주 훌륭하게 언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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