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이야기
존 카스티 지음, 이민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이렇게 허구적 배경 속에서 과학과 기술에 관련된 지적, 인식론적 논쟁거리를 얘기하는 것을 ‘과학적 소설 scientific fiction’로 부르자고 저자는 제안한다. 언뜻 드는 생각이, 어려운 주제를 독자에게 전달하기에 좋은 방법이겠다 싶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반대 논리가 서로 오고 가니까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 철학적 사변思辨들이 만만치는 않다. 나에게 존 L 캐스티의 책은 두 번째인데, 여전히 어렵다.

우선, 앨런 튜링이 알고리즘, 튜링기계(형식기계), 멈춤문제(halting problem) 등으로 논쟁을 시작한다.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모방게임(튜링테스트)’이 제안된다. 오로지 겉으로 드러나는 반응만 보자는 얘기인데, 행동주의 심리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에 반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상형문자 방 논증’을 내민다 (1950년대 후반 존 설의 ‘중국어 방 논증’을 미리 끌어온 거다). 기계가 기호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인데, 결국 ‘통사론’과 ‘의미론’의 충돌이다. 다시 튜링의 반격; 방안의 두뇌만은 의미론적 연산 상태가 아니겠지만, 방 전체로는 분명 그런 상태다 (튜링체계). 슈뢰딩거의 어시스트; 단지 기호 자체의 상호작용에서 의미가 산출될 수 있다. 기호 배열을 변경시키면서 기계가 그 과정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데 논리적 결함은 없다 (밝은 방 논증). 계속해서, 언어 문제에서도 튜링의 '통사론(보편 문법, 노엄 촘스키 통사구조론 1957)'과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론(그림이론, 사회적 관습)'이 부딪치고, 개성/문화 문제에서는 물질론 vs 정신론, 다수성 vs 유일성 딜레마, 계산주의 등이 언급된다.

각자의 주장은 이렇다; 사람의 생각은 언어와 삶의 공유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이 책에서 그는 거의 신경질적이다).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계가 만들어 질 수 없을 물리적 또는 기술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슈뢰딩거.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없는 근거를 못 찾겠다?). 기계는 영혼이 없다. 잘 모르겠다 (홀데인. 그는 좀 겉돈다). 현대의 기술이 사람의 사고 과정을 기계 안에 포착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튜링. 오늘의 주인공). 이 만찬의 호스트는 찰스 퍼시 스노우인데, 익히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논했던 전력을 비추어 볼 때,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위 대가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독자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버겁다면, 현 시점에서 ‘인공지능’의 상황을 한번 보자 (이 책은 1949년을 가정하고 있다). 1956년 다크머스 회의에서 <인공지능>이 최초로 명명된 이래로 이 분야는, 인간의 추론을 1또는 0의 연속체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기호/수리 논리학에 중점을 두는 『top down』진영과, 실제 두뇌 신경구조를 하드웨어에 모방해야 한다는 『bottom up』진영이 대립하고 있다. 각자 진영은 기호체계가설, 연결주의, 전문가시스템, 에이전트, 신경망기술, 퍼지논리기술 등으로 변모하며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이 책의 <뒷 이야기>편에서 저자가 주목하라는 분야가 ‘체스 게임’과 ‘자연언어 번역’인데, 이 쪽은 그럭저럭 이지만, ‘상식추론 기능’은 여전히 6살 어린아이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저자의 마지막 주장이 정확한 상황인식으로 보인다. 지적 능력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어서, 인간과 기계가 잘하는 분야가 각각 있고 따라서 얼마간은 이 둘이 평화롭게 공존하리라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이, 본문 중에 슈뢰딩거도 잠간 말을 꺼내다 말았지만, 굳이 사람 같은 기계를 만들어서 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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