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ㅣ 까치글방 121
로얼드 호프만 지음 / 까치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자 후기에 보면 저자에 대한 프로필이 자세히 나와있다. 역자의 지도 교수이기도 했던 로얼드 호프만은, 양자화학적 분자 궤도를 근사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확장 휘켈 방법’과 우드워드-호프만 규칙이라고 불리는 ‘궤도함수 대칭보존 이론’ 등의 업적으로 1981 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노학자이다. 언뜻 의외인 것이 (특히 우리 실정에서 보면, 서구에선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닌 듯 하지만), 이 화학자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인문학적 소양도 만만치 않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기도 하단다. 화학을 하기 위해 인문 분야의 유혹을 가까스로 뿌리쳤다는 저자 스스로의 고백도 있다.
그래서, 책 내용도 단순히 화학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다양한 매체에 써왔던 글들에는 역사,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인문적 소양이 화학적 지식과 씨줄 날줄로 교묘히 얽혀 있다. 메케한 화학 약품 냄새를 향긋한 꽃 향기와 싱그러운 풀 내음이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랄까? 아차, 싱그러운 풀 내음도 사실은 화학인 것을!!! (스피아민트의 맛과 향은 l-카르본 분자에 기인한다. p.69). 그래서 자연적/비자연적인 구별에 대해 저자가 던진 물음도 볼 수 있다.
일단, 냄새를 풍기는 씨줄로는 화학 분석, 합성, 메커니즘, 정적/동적 평형, 촉매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환원주의, 정체성, 창조와 발견, 이상과 현실, 실용성과 피해, 신뢰와 의심 사이의 긴박감, 관찰과 간섭의 이원성, 순수와 불순의 이원성, 그리고 민주주의 등의 이야기가 향기를 내며 날줄을 이룬다. 수직적 이해와 수평적 이해라는 분류를 통해 환원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도 눈길을 끌고, 화학이 다른 과학과 달리 발견적인 면보다도 창조적인 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즉, 분석 보다는 합성), 핵심과학이면서 오히려 예술에 가깝다는 주장도 호프만 답다는 느낌이다. 화학을 비롯한 과학과 민주주의의 관계, 민주시민으로서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화학적 이해에 대한 설득도 공감이 된다. 이쯤 되면 화학책이라기 보다는 종합 인문교양서 비슷하겠다.
책 제목인 『The Same and Not The Same』은 이성질체, 동위 원소, 키랄성 분자 얘기에서 출발했지만, 위에서 보듯 화학에서 나타나는 여러 대립성, 이원성을 대표한다. 그래서 마무리는 그리스 신화의 케이론으로 장식된다;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한 것의 환생, 인간이면서 괴수, 정적이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긴박하며, 복잡하면서도 통합된 존재, 해칠 능력이 있으면서도 선을 추구한 존재 -- 마치 화학과 같이!!!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