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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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읽으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중도 좌파의 좌장인 베른슈타인의 사회 개혁 이론에 진정한 좌파의 적자로 부각될만큼 강인한 혁명의 논리로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계를 침묵시켰던 여인. 그래서 그랬는지 그녀의 사상에 대한 지성적 관심은 그녀의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었다. 그 때 그녀의 평전이 번역되어 나와주었다. 막스 갈로의 세심한 글쓰기와 그녀의 붉은 삶이 어우러진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을 보자마자 난 좌판대에 서서 거침 없이 페이지를 넘겨갔다.

저자는 '여자, 절름발이, 유대인'이라는 세 가지 악재를 극복한 한 여인의 관점에서 그녀의 인간됨과 혁명가 됨의 범주를 넘나들며 로자의 삶을 기술했다. 어린 시절의 성장부터 폴란드에서의 활동, 스위스에서의 외로움, 독일에서의 새로운 삶과 혁명가로서의 위치 에너지는 그녀가 이러한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넉넉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그녀가 소녀시절 유대인으로서 러시아 학교에 다니면서 그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늘 책을 읽고 공부했다는 대목과 그 당시 '사회주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일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곧 그 길로 들어선 후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채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던 모습에 있다.

누가 여자를 약하다 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세상을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신념의 가치를 지켜낸 진정한 지성인이었다. 이제는 이미 낡은 이데올로기 취급을 받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이토록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의아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 어떤 자본주의자가 그녀만큼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지켜갈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그의 이념은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묻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냉담한 사회에서도 로자의 신념은 사회주의의 정신을 더욱 더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당시 레닌이나 베른슈타인과 같은 좌파 내의 이념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근본 이념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한낮 이데올로기적 연극이 아닌 진정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막스 갈로는 그녀의 인간적인 삶도 애써 그리기 위해 가족들간의 관계, 혹은 그의 연인이었던 레오와의 사랑과 갈등도 이 책에서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사상가로서의 그녀와 한 여인으로서의 그녀가 책 전편에서 오버랩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까지 그녀의 삶을 가볍게 보지 못하고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삶에 선연히 뿌려져 있는 붉은 핏자국에 대한 경배 때문이었을까? 이 땅에서 독립만세가 외쳐지기 불과 얼마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란트베르카날의 강물 위에서 떠오른 그녀의 시체는 그녀의 삶 전체를 대변하는 퍼포먼스였다. 그렇다면 그 퍼포먼스의 마지막 장면까지 읽는 나는 하나의 관객이었을까? 그 점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덮으면서 박수 대신에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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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여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최석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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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평등에 대한 문제가 화두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불란서 대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비로소 정착되면서 오랜 사회 현상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던 가부장적 권력 구도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무너지기 시작되었고, 결국에 가서는 남녀가 가지는 존재론적 동등가치를 기치로 하는 성해방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이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서 남성 중심의 권력 기제가 낳은 사회적 산물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미셀 푸코나 아네트 쿤 등은 그런 점에 깊이 첨착해서 인간의 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상 이런 흐름은 인간의 욕망의 기제를 존재론적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 심리학적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성의 본질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다룬 책이 있다.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남과 여'가 바로 그것이다. 철학과 인류학, 정신분석학, 자연과학 등의 범주를 넘나들면서 미 개척분야인 현대 여성학의 토대를 놓은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녀의 지성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존재가 부여안고 있는 해부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동일적 존재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바댕테르는 섹슈얼리티의 상호보완성의 시원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신의 논지를 시작하고 있다. 인간 현상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너무나도 분명해 보인다. 해부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그 둘은 영원한 나-너의 관계에 있어 보인다. 그래서 전통적 가치 체계에서 섹슈얼리티는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회를 구성하는 완전한 상호보완적 존재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하나와 다른 하나'로서 상호보완적 존재라는 저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바댕테르는 지난한 문화인류학적 여행을 시작한다. 영장류의 궁극적 진화체로서의 인류는 존재적 본질을 사회문화적 코드에 따라 적응하였고,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분리를 자연스럽게 확립하였다고 그녀는 보았다. 그녀에 따르면 인류의 사상 속에 자리잡은 이원론적 개념의 영원성은 아마도 남녀의 구분이라는 이 섹슈얼리티의 인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그녀의 이러한 논지는 전방위적인 깊이에서의 지성적인 탐구로 확립되어 간다. 원시 시대가 가지는 남녀의 상호보완적 체제에서부터 자연의 어머니로서 숭배받는 모권 사회, 그 후 신적 의식의 형성과 더불어 형성된 절대적 가부장 사회로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수만년의 역사에서 나타난 인류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토대로 섹슈얼리티의 역할 분담 및 지배 담론의 이론적 배경을 훑으면서 바댕테르는 섹슈얼리티의 기능성이야말로 사회적 유산이지 절대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인간본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저자의 의식은 '하나와 다른 하나'로부터 '하나는 다른 하나'로 논리적으로 전이되고 있다. 과거의 상호보완적 존재에서부터 이제 상호평등적 존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권력과 지배 담론은 지극히 사회적 유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식의 전이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여성 간에 나타나는 권한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퍼즐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그녀의 에필로그는 그런 현상을 외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남녀의 역할에 대한 관념의 변화에 대한 바댕테르의 지성적 탐구는 놀라운 업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녀 역시 남녀가 가지는 해부학적인 차이만큼이나 그 존재들 자체의 차이의 시원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것이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인류가 안고 있는 영원한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더러는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또는 주체성의 철학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보려 하겠지만 그 역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나마 인류 역사 전편을 통해서 사회 문화적으로 이 문제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했던 바댕테르의 지성이 더 빛나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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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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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에 대한 접근 방식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달라지게 될 것이다. 미학적이 접근방식에서 먹는 것은 식도락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의미론적 접근방식에서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주의적 접근방식에서 볼 때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유명한 자연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는 헬렌 니어링이 차려놓은 '소박한 밥상'이 그 답을 주었다. 먹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다. 니어링은 먹는 것을 생명과 연결시켰다. 그것을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는 우리의 행위 속에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이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저자가 던지는 물음속엔 소박한 그녀의 철학 속에 담겨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대한 도전이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채식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강한 삶에 역점을 둔다. 니어링의 밥상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소박한 밥상은 채식주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탐욕스런 현대 물질문명주의에 대한 경고의 퍼포먼스이다. 물론 그녀의 책은 그렇게 혁명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 철학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만큼 탁월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자연주의적 시각에서 설파한 루소의 혜안이 니어링의 밥상에 잘 차려져 있다.

그렇다면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에 올려진 메뉴는 어떤 것인가? 싱그런 과일들, 요리되지 않은 단순한 야채들, 가공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식품들, 가급적 스스로 가꾼 자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공급된 식품들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위한 메뉴이다. 그리고 이 요리책 아닌 요리책 속에 그녀가 소개하는 메뉴들이다.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사실 너무 풍성하다. 이미 설명한 먹는 행위의 의미뿐만 아니라 소박한 밥상이 주는 많은 삶의 철학들이 넘쳐 흐른다. '최선의 요리는 요리하지 않는 것이다.' '요리에는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든지 음악이나 책에 몰두하고 싶다.' '인간만이 음식을 먹기 전에 조리한다.

육식을 반대하는 그녀의 이유는 이렇다. '그것이 불필요하고, 비합리적이며, 해부학적으로 불건전하고, 건강하지 못하며, 비위생적이고, 비경제적이며, 미학적이지 않고, 무자비하며,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반면에 '식물과 과실, 씨앗, 견과를 먹고 사는 것이 이성적이고 친절하며 지각 있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기 때문에 채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채식주의자들에 의해서 단편적으로 제시되어 왔던 여러 철학적 의미들이 헬렌 니어링에 의해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녀의 밥상은 단순히 소박한 밥상만은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소박하지만 정신과 영혼을 위해서는 더 없이 풍성한 밥상이다. 이런 밥상이 차려지기를 꽤 원했던 독자들은 이 책을 품에 안고 사유의 풍성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신의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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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 나의 인생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유시주 옮김 / 눌와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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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무엇을 딛고 서 있으며, 어떤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주어진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한 번 쯤은 새로운 인생을 체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기란 왠만한 용기를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용기 하나만으로 그 체험이 가능한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의 체험을 읽는 것이다. '나무 위 나의 인생'은 이런 점에서 적절한 체험을 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한 여성 과학자의 삶을 보여준다. 지구의 마지막 허파로 불리우는 열대 우림의 숲 속을 헤집고, 숲속 우듬지(나무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눈으로 관찰하고, 가슴으로 관찰한 사실들을 머리로 재현시킨 그녀 자신의 삶이 기록이기에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체험으로 우리의 삶에 유입된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일대기가 기록된 장엄한 서사시가 아니다. 오히려 가슴으로 느껴지는 잔잔한 수필이다. 그래서 시튼의 '작은 인디언의 숲'과는 또다른 감동이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는 단지 숲속에서의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여성 과학자로서, 한 어머니로서 겪는 일상의 경험을 함께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저자가 단지 생물학자의 눈에 비친 세상만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같다. '나무 위 나의 세상'이 아니라 나무 위 나의 인생'이 제목이 된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이 책은 내게 몇 가지 중요한 사색의 기회를 주었다. 생명의 동반자들은 숲의 생명체들-꽃, 잎사귀, 열매, 가지 등-이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삶(생명)의 신비를 다시 한 번 음미하도록 한 것 하며, 나의 인생 이면에 있는 또다른 인간들의 용기 있는 개척의 삶, 그리고 표면적인 환경론자로서가 아닌 삶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해, 등등.

다시 돌아와 나를 인식하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저자가 나무 위, 우듬지에서 그녀의 인생을 보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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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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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 인간의 삶의 중심을 찾이하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을 가장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들은 인간들이 수 천년동안 설명하기 위해 추구해 온 철학적인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성주의적 철학 담론이 무너지고 전혀 새로운 이해가 추구되고 있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나온 철학적 용어들은 주체가 아닌 주변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철학을 넘어선 철학이 시도되고 있다. 쉬르필로소피아란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 새로운 철학하기는 철학을 넘어서서 철학을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김용규의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그런 현상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독일의 프라이부룩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여, 그 예의 탄탄한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가장 철학적인 소설로 평가되는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출판한 이래 올해 새롭게 선보인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통해 반영된 철학적 단면들을 밀도 있게 해부하고 있다.

중앙역, 인생은 아름다워, 체리향기, 러브레터, 박하사탕,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 매니아가 아닐지라도 의례 한 번쯤은 보게 되는 영화들, 추천비디오 목록의 단골들인 이 작품들 속에 투영된 철학적 의미들을 주제별로 분석하는 저자의 치밀한 철학하기는 난해하고 복잡한 철학적 방법론을 일상으로 끌어들여 보다 친밀한 사색하기를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키에르케고르, 칸트, 카뮈, 리쾨르, 하이데거 등 그 이름만으로도 난해한 철학자들의 사유가 그리 복잡하지 않게 이해되어지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독자들이 받게되는 유익은 매우 크다고 본다.

아네트 쿤은 이미지의 힘에서 영상 언어가 가지는 위력을 설명하였다. 오늘날 영화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미디어가 아니다. 이제 영상 언어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상 기호 속에 의미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적인 영역으로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 보기에서 영화 읽기로 전환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를 요구받고 있다. '어떻게 영화를 읽을 것인가?'

그 한 단면이 김용규의 책 속에 예시된 것이다. 이 작업이 단지 그에게 의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조광제 이진경, 김영민 등에 의해 여러 책들이 꾸진히 나왔다. 김용규의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게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책이다. 특별히 그가 추천하듯이 비디오를 보면서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비디오를 보면서 인생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을 읽어야 하고, 철학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지성인들만의 특권이 아님을 위해서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대중들의 단골집이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카페에서의 잔이 차고 넘쳐 주체를 상실해 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참된 반성의 사유가 일게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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