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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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와 연년으로 출판되었다. 김훈씨의 글은 소설보다 산문집이 훨씬 더 끌려서, 사는 책들도 산문집 밖에 없다. 의외로 <<칼의 노래>>는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 사지 않았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훈빠를 자청하는 사람 중에 칼의 노래를 최고로 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김훈이 쓴 모든 글들 중에 산문이 최고다. 소설은 김훈스러움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저번 고전 모임 때 김훈씨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는데 '김훈스럽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 '김훈스러움'이 싫은 사람들로 호불호가 확실히 갈렸다. 김훈의 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싶어서 좀 놀랐다. 김훈씨의 보수적 가치관과 내 가치관은 서로 상이하지만 글은 누구에게나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튼 나는 그런 '김훈스러움'을 사랑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은 제목부터 끌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든 좋아했던 일이든 그것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그 일은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일이 주는 스트레스의 크기는 그것이 취미일 때는 티끌만 하다가 강제성을 띠고 승패 혹은 실적과 연관되는 순간부터 태산만해진다. 아주 일부의 사람만이 개인의 적성과 밥벌이가 일치해서 직업이 취미이자 곧 밥벌이가 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겠노라고 처음 말했을 때 나를 말리던 사람은 광고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학교에 온 분이었다. 그 분은 광고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신방을 전공해서 바로 광고 회사에 취직했다. 처음 2년간은 정말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그 분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는 매일 해야 하는 야근 탓도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느끼고 나서였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 후회가 안 남겠지만, 그래도 정말 말리고 싶다'는 게 그 분 말씀의 요지였다. 밥벌이는 밥벌이대로, 하고 싶은 일은 취미 생활로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도 말했다. 생각하는 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경험해온 것도 다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은 말씀대로 받아들였다. 작년 같았으면 그건 아니죠-로부터 시작해서 이상에 다다를 순 없어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같은 헛소리를 열심히 내뱉었을 텐데..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은 이런 게 아니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고 별 도리도 없다. 죽는 날까지 입에 밥을 채워 넣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떠들어댄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책을 좀 더 들여다보면 구성이 너는 어느 쪽-과 똑같다. 그래서 그런지 너는 어느 쪽- 2권 같기도 했다. 시의성 있는 이야기들 두 파트에, 말 그대로 산문이 두 파트이다. 이번에도 시의성 있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특이하게도 월드컵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는데 책을 집필하던 당시가 2002월드컵이 열리던 때라 그런 것 같다.


산문 중 좋았던 글은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이었다. 아직 자가 운전을 하지 않지만 조금만 먼 거리를 갈 때마다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내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글이다. 차나 오토바이를 타며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 김훈씨의 눈에는 그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도로로 나오는 사람들로 보인다. 사람들은 '쾅' 한번이면 생사가 뒤바뀌는 것을 알고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책을 보던 시기에 집에 내려갈 일이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고속버스를 타는데다가 책을 읽고 나니 시속 100km로 달리는 쇳덩어리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오며 가며 읽으려고 책을 3권이나 챙겼는데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김훈의 글을 보면 '이건 누가 봐도 김훈의 글이다' 싶은 게 있다. 아직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핸드폰을 쓰지 않고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김훈의 아날로그적 삶과 글쓰기가 부럽다. 펜과 종이 앞에서 벌벌 떠는 나와 달리 김훈의 글쓰기는 지우개를 동반하고 거침이 없다. 글쓰기 수업 때 컴퓨터 글쓰기는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컴퓨터로 옮기고 글을 조각내서 잘 이어붙이면 되니까 글이 쉽게 써진다고 했다. 펜과 종이의 글쓰기는 그럴 수가 없다. 안에서 다 정돈하고 완성된 이야기를 바깥으로 끌어내야 한다. 현시대 작가 중에 원고지를 고집하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김훈의 글이 대단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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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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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죽을 때까지 어제 일을 잊지 못 할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각자 갈 길 가자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의 고백과 뒤의 통보는 둘 다 쓰렸다. 고백 받는 순간에도, 통보받는 순간에도 <<청춘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사실- 통보받는 순간에는 이성이 마비되고 있는 게 느껴졌는데 자꾸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내가 보였다. 어떻게든 내 식대로 해석해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하는 걸 몰랐다. 멍청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유행가 가사처럼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 이제 어떻게 살지. 받은 고백은 뇌리에서 멀찌감치 사라지고 통보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정말 어떻게 살지. 10년 후에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팔할이 통보의 힘일 게다. 죽을 때까지 내 편일 것 같던 사람의 통보는 정말이지 평생 못 잊을 거다. 모든 게 내 탓인 것을..


김연수 시대(?)의 사람들은 김수영과 김지하를 읽었나부다. 다른 작가의 책에서도 김지하와 김수영을 봤었다. 내게 김지하와 김수영은 생소한 존재다. 어렴풋이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사람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만한 힘을 가진 텍스트는 짧은 시면 족하다는 걸 두 사람의 시가 보여준다. 시의 'ㅅ'도 모르는 나는 시인의 이름은 알되 시는 모른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도 잘 모른다.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것도 실은 그의 글에 '뭔가 마음을 끄는 게 있어서'와 같은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출발한다.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 내가 쓰고 싶은 글도 그런 글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글.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중략)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 살아 있음의 반대어는 죽음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죽은 시간이라 부르지 않는다. 살아 있지 않다 해서 죽어 있다 부를 수는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간. 누군가의 기억 속에 혹은 내 기억 속에 지나간 시간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설령 그게 내 것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 아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어 지금 껏 살아온 모든 시간은 살아있다. 내가 변하면서 세월이 흐렀다는 사실은 가슴이 저린다. 그렇지만 온전하지 못한 인간에서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성장한 거라면 흐르는 세월이 아프지만은 않다. 조금씩 조금씩, 어제 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청춘은 지나고 나야 그 시절이 봄인 걸 깨닫는다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슬픔, 걱정, 고민들은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모두 파아란 시절 먼지보다 가벼운 것들임을 알게 되겠지. 시간이 지난 후 청춘을 떠올린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노을빛이 들어오고, 읽고 있는 책에 빛이 닿으면 하늘을 바라보며 괜히 가슴시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 청춘인 나는 지금을 좀 더 사랑하기로 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인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청춘을 사랑해줘야지. ten days of happiness. 열흘의 행복이면 이유는 충분하다.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오래간만에 시침이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상태든 상관없이 시간은 무심히 계속 흘렀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애원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 삶이 너그러운 건 이때뿐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든 지나간다. 아픈 마음에 시간이 약이 되길. <<청춘의 문장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언저리를 감싸길. 

 

사족.


요즘은 책을 읽다가 목이 메는 경우가 늘었다. 보통 책을 읽는 장소가 집, 학교, 학교 가는 길. 이렇게 세 군데로 한정되다시피 한데, 집에서야 울컥하면 엉엉 울면 그만이지만 나머지 장소에서는 맺히는 눈물을 참아내기가 힘들다. 10대 여고생의 감수성이 지금 찾아왔나. 예전에는 없었던 감정이 지금에 와서야 샘솟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약해진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다. 이런 게 약해지는 거라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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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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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씨의 글이 좋다. 문장의 종결어미 하나를 놓고 고민하는 그의 글쓰기가 좋다. 그의 글에는 삶에 대한 성찰과 따뜻한 시선이, 때로는 예전의 기자 생활이 묻어나는 듯한 날 섬이 동시에 담겨있다. 전자의 절정이 '칼의 노래'라면 후자의 절정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이다. 이전의 제목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보다 개정판으로 나온 지금의 제목이 더 마음에 담기는 이유는 뭘까. 제목에 쓰여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 속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의 '다시, 임화를 추억함'이 대답 쯤 되지 않을까-하고 추측하는 것뿐이다. 책 속에서 작가는 어느 쪽도 누구의 편도 아니다. 다만 초야에 묻혀 글쓰기만을 소망한다. 작가는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지 않다. 그가 써내려간 글들도 현 시대 지식인으로서 최소한의 포지션만이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제목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다. 무리를 무릅쓰고 말하면, 제목은 작가가 내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고 있는 너는 어느 쪽이니?

 
책은 4가지의 중간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간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와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개 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며. 이 4가지 주제를 들여다보면 '아들아'와 '너는'은 시의성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그래서 글 말미에 주석도 달린다- '시간은'과 개 발바닥은 작가가 우리 삶을 관찰한 이야기들이다. 앞의 반은 칼럼 뒤의 반은 산문집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 좋았던 건 앞의 반절이었다.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서늘한 감정이 내게도 그대도 전해져왔다. 이런 눈을 갖고 살아가고 싶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작가의 적은 끝끝내 독자라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라고도 했다. 김훈씨는 일당백을 넘어 일당천만쯤 되려나-


같은 날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과 단신 란에 겨우 몇 줄을 올린 사건 사이에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고 중요치 않은 사건은 또 뭔가. 책을 읽으며 언론의 아젠다 세팅 기능을 떠올렸다면 오버인 걸까. 사실은 사실을 떠난 순간 이미 사실이 아니다. 언론을 통해 우리가 듣고 보는 것들은 사실이 아닌 그 무엇이다. 내내 이걸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시대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혜안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 같았다. 중요한 것도 사실인 것도 없다. 사실이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사실을 다루는 인간이 이미 주관적이므로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는 것이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서 직접 이해할 것, 사물과 인식 사이에 잡것이 끼어들지 않도록 늘 경계할 것." 얼마 전 부엌에서 뭔가를 준비하다 찬장 안에 죽어 있는 바퀴벌레를 보았다.-나는 바퀴벌레포비아다. 바퀴벌레를 심하게 무서워하는데 보면 소름이 돋고 죽을 것만 같다.- 곧바로 모든 의지를 상실해서 준비하던 걸 포기하고 책을 읽으러 서재로 들어갔다. 책에 전혀 집중이 안 되었는데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치울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침실에서 자고 있는 룸메를 깨웠다. 룸메도 기겁했지만 무섭지 않다고 몇 번 최면을 걸고 찬장에 다가갔다. 갑자기 부엌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바퀴벌레가 아니었다. 바퀴벌레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검댕이였다. 처음에 안경을 쓰고 재차 확인 했을 때도 내 눈에 그 검은색 물체는 분명 바퀴벌레였다. 그런데 바퀴벌레가 아니었다. 현실의 검댕이와 내 머릿속 바퀴벌레 사이에는 어떤 잡것이 있었기에 나를 놀래킨 걸까.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내 눈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작가는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그 어떤 것도 개개인의 삶의 구체성을 매몰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편적인 일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이 개인의 죽음에 위로가 될 수 없다. 보편적인 것과 '나'의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개인 삶의 면면은 언제나 고단하다. 그러한 고단함이 삶의 구체성이라면 행복지수나 GDP 같은 수치들은 일상의 구체성을 추상화 한다. 행복지수와 GDP의 수치가 올라가는 것과 개별적 삶은 하등 관련이 없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낱 수치 놀음에 우리 자신을 밀어 넣고 있다.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는 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눈. 그 눈이 내게는 절실하다. 또,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 보편타당함은 누군가에게는 개별 부당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 역지사지- 이것만이 정답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한다.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편을 갈라 내 쪽에 선 사람에게 '우리'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게 달갑지 않다. 우리에서 제외된 사람들, 제외된 무리의 '우리'에서조차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우리라는 뭉뚱그런 호칭대신 '너'와 '나'를 꿈꾼다. 사회는 언제나 고통의 분담을 외쳐왔지만 고통은 단 한 번도 분담되었던 적이 없었다. 고통은 언제나 약자에게 전담되었다. 이런 현실은 누군가 해결할 수도 책임져 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토록 막막한 공간에서 연대하는 삶을 꿈꾼다. 구세군 냄비에 천 원짜리 한 장 집어넣는 일로도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기타.

김훈씨를 좋아하게 된 계기.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 꼬박 꼬박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게 된 계기. 모두 같은 날, 같은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날 문득, 낯모르는 타인에게 감명을 받고 시작하게 된 일들이다. 문체는 가볍고 단어는 진중하게-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한동안 그 사람의 문체를 흉내 내기도 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사람과 나는 여전히 타인일 뿐이다. 그래도- 당신이 바라듯, 내가 바라듯 5년 쯤 후에는 우리가 '현장'에서 뛰고 있기를. 그 '현장'에서 우리가 만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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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 '온 더 로드'의 박준,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나다
박준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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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보다 기차와 지하철이 좋다. 지하철이나 기차는 서서 가도 책을 편히 읽을 수 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는 책 읽기가 어렵다. 요새는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하는 상황이라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데, 이 경우 어느 지점을 지나면 100% 멀미가 온다. 그래도, 책을 펴자마자 멀미가 왔었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서울에서 군산 집에 내려갈 때 버스가 20분에서 40분 정도 빠르다. 가격도 일반 고속을 타면 버스가 저렴하다. 터미널이 역보다 집에서 훨씬 가깝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버스>기차 다. 그래도 굳이 기차를 타는 이유는 책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왕복 7시간 동안 못 해도 2권 많으면 3권까지 읽을 수 있다. 바리바리 싸들고 간 책들을 읽다보면 어느 새 집에 도착하곤 했다.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는 이번 집에 내려가는 길에 뚝딱 뚝딱 읽었다. 한 번에 책을 끝까지 읽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돌아오는 7월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김기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배낭여행의 시작은 무조건 동남아라고 했다. 거기서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을 만나고 느끼라고 했다.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한지라 무조건 동남아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유로화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이 올라있어 유럽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함께 가는 친구와 둘 다 가난한 학생 신분이라 여유를 부리기 어려웠다. 여러 이견 없이 동남아 25일 코스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기가 찾아온다는 7월의 동남아는 어떨까? 순전히 배낭여행 지식을 얻으려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여행 책들 사이에 꽂혀있던 써바이를 발견했다. 자주 가는 취업사이트(?)에 한 건의 글이 올라왔었다. 글쓴이는 올해 26살 여자고 2년 간 해외 봉사를 떠날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다녀오면 28살인데 가있는 동안 당연히 취업준비는 못 할테고 그런 상태에서 돌아오면 제대로 취업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내용이 글의 요지였다. 간다, 안 간다. 수많은 리플이 달렸는데 그 리플 중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가 있었다. 리플 덕분에 좋은 책을 보게 되었다.


책은 작가가 캄보디아 여행을 하며 느낀 개인적 기록 조금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사실, 써바이-를 보자마자 느낀 건 '책이 너무 예쁘다'였다. 북 디자인의 중요성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합본을 보며 절절히 느꼈지만 이번에는 다른 느낌의 예쁘다-였다. 적절한 사진배치와 전체적 느낌이 좋았다. -여행 에세이 책들은 대부분 사야겠다, 사야겠다- 군침을 흘릴 만큼 책이 예뻤다. 읽고 나면 빌려 읽길 잘했다는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겉면만 느낌이 좋은 건 아니었다. 내용도 사상(??)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렇게 살다보면 죽을 때 뭐가 남을까. 정말 좋은 차사고 좋은 집사고 그런 게 행복한 걸까. 


내 나름대로의 답변은 그건 사람마다 달라-다. 캄보디아로 떠난 사람들은 좋은 차와 집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어서 봉사하는 삶을 택한 거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도 남아있다고 모두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 행복하게 살아간다. 나는 중간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누구나 그런 건 아니지만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처음엔 이력에 한  줄 넣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책에서 캄보디아로 일주일 간 봉사활동 간 대학생들처럼 이력서나 채워보려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자소서에 늘 넣는 이야기지만 내가 행복해서 계속하고 있다-많은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서 활동한 내용이 이력에 도움이 되지 않겠구나,는 깨달음도 얻었다-. 책 속의 이기원씨의 말처럼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아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삶을 꿈꾼다. 그걸 실행에 옮기지 못 하고 꿈으로 남겨두는 이유는 '현실'이 막아서 일 것이다. 이게 걸리고 저게 걸리고 여유가 없고.. 이유를 대자면 끝도 없이 말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한 움큼의 씨앗이라도 있다면 지금 바로 봉사를 시작하라. 지금 나누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나누지 않을 것이다. 장소가 해외든 국내든 그건 중요치 않다. 누군가와 나눌 때 행복해지는 게 어떤 건지 느낀다면 당신도 봉사중독(?)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봉사활동을 해오며 중독 증세를 보이는 대학생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들의 삶이 얼마나 반짝이고 행복해보였는지 모른다.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누면 행복해진다. 즐거워진다.


사족.

배낭여행을 처음 계획했을 때 책을 보며 관광지를 돌아다니려고 했다. 세계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써바이-를 보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여행 계획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친구에게도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를 추천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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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이 남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읽기 시작한 엊그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음이 울렁거린다. 보통의 책을 읽듯이 밑줄 칠 펜과 표시해 둘 스티커를 준비하고,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까지는 밑줄도 치고 스티커도 붙이고 그랬다. 어느 지점이 지나자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몇 번 정도는 집 밖에서 책을 보다 울 뻔 한 적이 있었다.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울컥할 때면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게 다였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출퇴근길에 책을 보다 갑자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헤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되지 않았다. 버스, 지하철, 학교, 집에 걸어오는 길,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 눈물이 났다. 집에 도착해서는 통곡을 했다. 책은 아직 1/3도 읽지 않은 지점이었다.

엄마는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존재였다. 고등학교 때 엄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선 항상 눈물이 났다. 나보다 훨씬 어렸던 동생은 내가 울면 따라 울곤 했다. 택시 안에서 엄마를 두고 했던 다짐들은 형철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엄마를 위해 뭐든 해야 겠다 눈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혼자 사는 엄마 집에 자주 왕래하게 되고 거의 매일 전화를 하며 차츰 그런 감정들-나도 모를 가슴 아픔-이 사라졌다. 여전히 엄마를 위해 효도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자주 만나게 된 만큼 막말도 하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들도 여럿 있었다. 책을 보며 자꾸 엄마가 겹쳐졌다. 어릴 적 엄마를 만난 후 택시 타고 집에 갈 때의 마음,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저림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학생 시절 상처 많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를 어느 정도나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를 부탁해>>는 애초에 한 권은 내가 읽고 다른 한권은 엄마를 드리려고 두 권을 샀었다. 엄마는 이 책을 읽으며 '엄마의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엄마의 엄마는 박소녀 아주머니와 더 닮아있었다. 80 평생 쓰러지는 날까지 일만 하셨던 엄마의 엄마,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 시절 5남매를 키우려고 악착같았던 할머니는 돌아가시던 순간에는 어린 아이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가끔씩 할머니를 떠올리며 참 매정한 분이라고 말했다. 엄마를 고등학교에 보내준 건 막내 삼촌이었고 할머니는 여자가 그만하면 다 배웠지 뭘 고등학교까지 가려고 하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공부와 관련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해보라고 했다. 학교를 자퇴하겠노라 말했을 때 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라고 했고 옮긴 학교에서 또 한 번 자퇴하겠노라 말했을 때도 그래라-라고 하셨다. 뭘 하든 잘 할 거라 믿는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초등학교 때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딸은 엄마의 삶을 닮아간다-'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 때는 아직 어려서 딸이 엄마를 닮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할머니의 삶을 30대의 엄마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젊었을 때 고생 안 하면 나이 들어서 엄마처럼 고생하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책의 '너'도 말했지만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다. 엄마 인생이 뭐가 어때서-

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핸드폰에 내 사진을 찍어두곤 하셨다. 차려입고 가거나 머리 모양이라도 바꾸면 꼭 사진을 찍어 놓으라고 하셨다. 철철 마다 새로 찍은 나와 동생의 증명사진을 챙겨가곤 하셨다.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 사진이 몇 장인지 궁금해졌다. 엄마의 20대 증명사진 한 장과 최근에 찍은 증명사진 한 장, 9년 전쯤 동생과 셋이 찍은 사진 2장, 내 핸드폰에 찍혀있는 막 찍은 사진이 3장 정도 있었다. 제대로 된 엄마 사진은 최근-이래봤자 5년 전 사진인데-에 찍은 증명사진뿐이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 사진 한 장 제대로 없는 지헌이네 가족들과 나는 다를 게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주문했다. 다음에 엄마 집에 갈 때는 사진 많이 찍어드려야지-


소설에 등장하는 1인칭 화자는 박소녀씨 하나뿐이다. 너, 그, 당신, 2인칭과 3인칭 화자들은 시점은 1인칭이되 2,3인칭으로 나타났다. 엄마는 한 번도 1인칭인 적이 없었다가, 없어지고 나서야 1인칭이 되었다. 엄마는 날 때부터 엄마였다가- 없어지고 인간 박소녀가 되었다. 나는 늦지 않아 다행이다- 엄마는 엄마가 아닌 한 주체적 인간임을 지금에라도 깨달아 다행이다.

자고 일어나니 눈이 부어있었다. 눈이 부을 정도로 펑펑 울어본 게 몇 년 만이지 모르겠다. 정신이 혼미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책을 읽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이 정도로 여운이 오래갈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엄마를 부탁해는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내 이야기였다. 소설에 이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되는 것도, 그래서 끝난 후에도 정신 차리지 못 할 정도로 허우적대고 있는 것도 모두 신경숙씨의 힘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힘은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100% 멀미가 오곤 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한 번도 멀미가 오지 않았다-'로 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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