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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죽을 때까지 어제 일을 잊지 못 할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고백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각자 갈 길 가자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의 고백과 뒤의 통보는 둘 다 쓰렸다. 고백 받는 순간에도, 통보받는 순간에도 <<청춘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사실- 통보받는 순간에는 이성이 마비되고 있는 게 느껴졌는데 자꾸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내가 보였다. 어떻게든 내 식대로 해석해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하는 걸 몰랐다. 멍청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유행가 가사처럼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 이제 어떻게 살지. 받은 고백은 뇌리에서 멀찌감치 사라지고 통보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정말 어떻게 살지. 10년 후에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팔할이 통보의 힘일 게다. 죽을 때까지 내 편일 것 같던 사람의 통보는 정말이지 평생 못 잊을 거다. 모든 게 내 탓인 것을..
김연수 시대(?)의 사람들은 김수영과 김지하를 읽었나부다. 다른 작가의 책에서도 김지하와 김수영을 봤었다. 내게 김지하와 김수영은 생소한 존재다. 어렴풋이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사람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만한 힘을 가진 텍스트는 짧은 시면 족하다는 걸 두 사람의 시가 보여준다. 시의 'ㅅ'도 모르는 나는 시인의 이름은 알되 시는 모른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도 잘 모른다. 내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것도 실은 그의 글에 '뭔가 마음을 끄는 게 있어서'와 같은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출발한다.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 내가 쓰고 싶은 글도 그런 글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글.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중략)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 살아 있음의 반대어는 죽음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죽은 시간이라 부르지 않는다. 살아 있지 않다 해서 죽어 있다 부를 수는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간. 누군가의 기억 속에 혹은 내 기억 속에 지나간 시간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설령 그게 내 것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 아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어 지금 껏 살아온 모든 시간은 살아있다. 내가 변하면서 세월이 흐렀다는 사실은 가슴이 저린다. 그렇지만 온전하지 못한 인간에서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성장한 거라면 흐르는 세월이 아프지만은 않다. 조금씩 조금씩, 어제 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청춘은 지나고 나야 그 시절이 봄인 걸 깨닫는다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슬픔, 걱정, 고민들은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모두 파아란 시절 먼지보다 가벼운 것들임을 알게 되겠지. 시간이 지난 후 청춘을 떠올린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노을빛이 들어오고, 읽고 있는 책에 빛이 닿으면 하늘을 바라보며 괜히 가슴시린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 청춘인 나는 지금을 좀 더 사랑하기로 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인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청춘을 사랑해줘야지. ten days of happiness. 열흘의 행복이면 이유는 충분하다.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오래간만에 시침이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상태든 상관없이 시간은 무심히 계속 흘렀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애원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 삶이 너그러운 건 이때뿐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든 지나간다. 아픈 마음에 시간이 약이 되길. <<청춘의 문장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언저리를 감싸길.
사족.
요즘은 책을 읽다가 목이 메는 경우가 늘었다. 보통 책을 읽는 장소가 집, 학교, 학교 가는 길. 이렇게 세 군데로 한정되다시피 한데, 집에서야 울컥하면 엉엉 울면 그만이지만 나머지 장소에서는 맺히는 눈물을 참아내기가 힘들다. 10대 여고생의 감수성이 지금 찾아왔나. 예전에는 없었던 감정이 지금에 와서야 샘솟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약해진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다. 이런 게 약해지는 거라면,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