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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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사회의 기본값에 들어가기 너무 어렵고 힘드네요. 그렇다면 기본값을 바꾸는 수밖에 없겠죠. 계속해서 불편해하고, 그 불편함을 떠들다 보면 사회도 불편함을 느끼게 되겠죠. 울지않는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으니 더 부지런히 떠들어야겠다고 책을 읽으며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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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 미니앨범 1집 : 지 (Gee) - 44페이지 미니화보집 형태 부클릿
소녀시대 노래 / SM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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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사랑해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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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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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고 이 영화를 꼭 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일생이 거꾸로 간다는 벤자민의 출생과 죽음이 어떻게 될지, 나의 굳어버린 머리로 아무리 상상해도 일말의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식으로 탄생과 소멸을 표현했을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결과물들이 정말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시놉대로 벤자민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면 아무리 작아도 40kg은 넘어갈 것이고 그걸 산모가 어떻게 감당했을까? 죽을 때는 다시 태아로 돌아가는 건가? 이건 뭐 나비효과인데- 이런 시덥잖은 생각들만 머리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오늘에서야 봤다. 그런데 아뿔싸! 이 영화 러닝타임이 3시간 이었다. 한 2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곧바로 이어지는 회차에 체인질링을 예매해 뒀는데 아아아- 영화 재미없으면 정말 고문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발렌타인 특수였는지는 몰라도 꽤 넓어 보이는 관객석도 가득 찼다.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집중하며 봤다- 옆자리에서는 크레딧 올라갈 때 영화가 왜 이렇게 기냐며 궁시렁 거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궁금해 했던 것들은 예상 외로 너무 당연하게 해소되었다. 저렇게 태어나고 저렇게 죽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나 혼자 SF소설을 쓰고 있었다. 벤자민은 자연스럽게 태어나서 조금은 특별한 삶을 살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죽었다.


영화는 액자구조로 진행된다. 캐롤라인과 데이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가 액자 바깥 구조, 벤자민의 일기로 나오는 과거의 상황들이 액자 안 구조다. 액자 안과 바깥은 별개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져 있는데, 이와 관련해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들이 있다. 액자 구조 시점이 다 그렇지만 벤자민 이야기는 캐롤라인의 나레이션과 벤자민의 나레이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당히 많은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그게 어색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이 액자 안팎을 넘나들어 영화 흐름이 끊기는 부분도 있었고,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쉽게 건너뛰는구나-싶은 장면들도 있었다. 러닝타임이 평균 영화 상영시간보다 1시간이나 긴 3시간인데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이유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도식적으로 보여줘서 였는데, 역설적으로 에피 하나하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건너뛰어서 제작자로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내게는 좀 아쉬웠다.


이 영화에서 벤자민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주인공 이름이 영화 제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벤자민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피트가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대략 80대로 추정되는 할아버지부터 20대 솜털 보송보송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분장의 힘이 50%였다면 피트의 연기력이 나머지 반을 메웠다. 괜히 비싼 개런티 받는 게 아니구나-  여자 주인공인 케이트 블란쳇도 정말 연기 잘했다. 발레 장면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봤다. 전공이 발레인줄 알았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춤을 잘 추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며 혼자 흥분했던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정리를 해보면

  1) 캐롤라인이 데이지에게 죽음이 두렵냐고 질문하는 장면
  2) 데이지가 벤자민에게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하는 장면
  3) 벤자민이 딸에게 써준 엽서를 캐롤라인이 읽는 모습


이 세 가지 장면에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모든 게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1) 죽음이 두려워요? 아니- 궁금해 죽음 뒤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결국에는 모두가 죽는다.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데이지에게서 봤다. 2), 3)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가 저절로 찾아 올 거라 생각하고 인생을 낭비했어.' 저절로 찾아오는 순간이란 없다. 엘리자베스의 후회는 해협을 횡단한 최고령자로 기네스에 올라가면서 사라졌을 것이고, 데이지의 후회는 벤자민을 다시 만나며 사라진다. 벤자민이 딸에게 쓴 엽서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적혀있다. 후회하지 마라, 뭔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다시 시작해라.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한 번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려 하지만 너무 자주 결심이 무너진다. 나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는가?


늙은 겉모습으로 태어나 젊어지는 상황에서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영화라고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았다. 데이지가 젊었을 때는 벤자민이 늙은 자신의 모습에 주저하고 반대의 상황에선 데이지가 주저한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말하는 시점은 둘의 나이가 교차했던 40대일 때뿐이었다. 그 전, 후로 둘이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벤자민이 젊어지는 설정 빼고 나머지가 무척 현실적이어서 잠시 슬퍼졌다.그래도 금세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오늘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이 보낸 문자를 받고 나서. "벤자민 버튼은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사람인 거 같아요." 이 문자를 보며 영화 결말과 상관없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겠구나- 했다. 


사족.
영화에 샤일로가 나온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아서 아기가 나올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봤다. 내가 샤일로다! 라고 생각했던 아기는 캐롤라인 어릴적 모습이었는데 역시나 맞았다. 샤일로야 사진으로만 보다가 영상에서 보니까 나 혼자 반가웠다 :) 굿나잇, 샤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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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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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끝난 시간이 다음 회차였던 체인질링과 10분이나 겹쳐 허겁지겁 영화관을 가로질러 도착했다. 3시간이나 영화에 몰입했다가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음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조금은 걱정스러웠으나, 예매한 영화는 영화 시작 후에는 환불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서 그냥 뛰었다. 도착해보니 영화는 이미 시작해있었다. 보통의 나는 영화나 연극을 보기 전에 리뷰나 스포일러를 꼼꼼히 확인한다. 어떤 사람은 그게 공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말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으면 놓치게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재미를 조금 반감시키고 많은 부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룰은 내가 예매하거나 관심 있어 하는 공연에 한정된다. 남이 보여주는 공연은 사전 조사 없이 그냥 찾아가서 보고 돌아온다. 체인질링이 19세 관람가라는 사실은 입장하고 나서 자리를 찾기 위해 표를 살펴볼 때 알았다. 몰랐으면 좋으련만 알고 나니 은근히 긴장됐다. 요 근래에 본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쌍화점'이 유일한데 같이 본 이성분이 의식돼서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난다. 영화 트레일러 볼 땐 유괴관련 이야기처럼 보였는데 혹시 이것도?? 영화에 피가 나오든 신음소리가 나오든 탐탁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체인질링은 처음부터 후반부까지 계속 불편했다. 영화가 시작한 후 입장해서 앞부분을 놓친 것도 불편했고, 3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2시간 30분을 더 앉아있으며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도 불편했다. 결정적으로 영화 상영 2시간 동안 머리에 핏대가 설 정도로 '불편'했다. 사실 마지막 불편함이 가장 컸다. 1920~30년 대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와 맞물린 경찰의 무능과 부패, 언제나 사이코 패스는 존재한다. 같은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머리 속에 파고 들어왔다.

영화의 가장 큰 뼈대는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 명제에 그 시대의 온갖 부조리들이 나타난다. 트레일러만 보고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담은 영화겠거니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1차 대전 종전 후 남성 우월주의를 업은 공권력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거의 1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뤄온 것처럼 보이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경찰의 부패지수나 권력 남용이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다른 아이를 찾아온 경찰이 실수한 게 아니었던 건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와 짜고 월터인 척 연기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린 아이가 그 정도로 강력하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은, 나는 어려서 소년원에 안가요-라고 당돌하게 외치던 꼬마를 보며 추측하건데 노숙자로 떠돌던 아이에게 따뜻한 집과 먹을거리가 생긴다고 유혹했기 때문일 듯. 이러한 사실 말고도 나중에 드러나는 정황 증거들은 데려온 아이가 월터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실이 뻔 한데도 반장은 자기가 꾸민 연극을 사실이라 주장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실제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닌 프레임이다. 반장에게 '저 아이는 반드시 월터여야만 한다'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고, 프레임의 효과는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아이를 찾아 달라 애걸하는 엄마를 면박주고, 무시하고, 미친 사람 취급하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한다. 반장은 LAPD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적 소아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권력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반발은 곧 경찰 전체에 대한 반발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정신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 현장은 당시 여자들의 지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찰에 대항하는 여자는 무조건 코드 12 정신병원 행. 국가는 맘만 먹으면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 2009년 2월 17일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 병원 안에서 동조했던 간호사들과 의사도 눈에 띄었다. 나치 정권 시절 유태인을 가스실에 집어넣었던 대다수는 나치당의 열혈 당원들이 아니고 독일에서 예비군으로 소집된 평범한 아저씨들 이었다지? 뚜렷한 주관이 없는 개인들은 자신이 의료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경찰의 무능함이 두드러진다고 하기엔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경찰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건 윗대가리들이었지 경찰 조직 전체는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나 현명한 사람들은 있다.

그 시절에도 사이코 패스는 있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강호순은 사회에 불만이 전혀 없고 본인의 현재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었다고 했다. 신문에서는 다른 묻지마 살인마들과는 다른 유형의 전형적인 서구형 사이코 패쓰가 등장했다고 떠들었다. 그래 딱 그 범인이 서구형 싸.패의 전형이었다. 그냥 아이들을 잡아다가 그냥 죽였다. 도끼로 아이들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나중에 범인의 조카로 나온 아이가 자백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되서 숨이 막혔다. 고백하던 순간이 불편함의 절정이었다.

절정이 끝나고 20분가량의 통쾌한 결말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결말이었다. 살인마 사형, 시장 재선 출마 포기, 청장 사퇴, 반장 영구 정직, 정신병원에 감금된 코드 12 여성들 석방. 가장 큰 문제 하나만을 남겨두고 꼬여있던 문제들이 줄줄이 해결되었다. 영화가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영화 마지막 부분을 보고서야 알았다. 실제로 아이를 찾지 못했고, 영화에서도 아이는 찾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허구였다면 이런 식으로 결말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동의 쓰나미가 몰아치게 5년 후에 나타나는 아이가 월터와 함께 갇혀있었던 아이가 아닌 월터였겠지. 그래도 밝게 웃으며 '희망'을 얻었다는 졸리의 미소에서 나도 희망을 얻었다. 

기타.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곧바로 눈에 띈 건 졸리의 새빨간 입술. 이미 시작한 영화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와중에 새빨간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촌스러운 빨간색으로 칠해놔도 섹시-했다. 20세기 초 여성들은 모두 입술을 저렇게 칠하고 다녔을까. 내 기억 창고에 다른 등장인물의 입술색깔은 전혀 없는 걸 봐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나이스! 정말 예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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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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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 리뷰를 써야겠다 생각했던 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대략 70분 동안 계속 눈물이 나서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왜 눈물이 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소가 죽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농군인 할아버지의 손을 보고 마음이 동했을까. 리뷰를 쓰기 위해 영화를 복기하다보니 첫 장면이 떠오르며 다시 마음이 뜨거워진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데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울컥했다.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오르는 노부부의 이미지는 할아버지의 "아이 아파"란 대사가 없어도 충분히 가슴을 저린다.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선 누군가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생각났고, 고생하고 있는 엄마도 보였다. 다시 볼 땐 꼭 엄마랑 봐야지- 두 번째 볼 땐 엄마와 같이 봤다. 엄마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영화는 다큐이면서 영화를 지향한다. 보통의 다큐 영화와 달리 자막을 쓴 이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투리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고, KBS다큐 '인간 극장'이-시청자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자막을 쓰는 목적과 동일하다. 다큐의 본질은 사실성이다. 영화는 tv에 방송되는 다큐와는 달리 충분한 경제적 계산이 들어간다. 극장에서 다큐영화가 성공하기 어려운 건 사실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관객을 끌어들일 만큼의 재미도 있어야하는데 일상이 언제나 버라이어티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원래 심심하다. 다큐가 심심하지 않으려면 소재가 특이하거나 상황이 특별하거나 뭔가 특별해야한다. 거기에 감독의 역량이 플러스 된다. 워낭소리에서 특별한 점은 소가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 하나. 다른 부분은 눈 씻고 찾아봐도 특이점이 없다. 보통 20년인 소의 평균수명보다 2배 많은 40년을 넘게 살았다니 특이하긴 특이하다. 그런데 소가 나이 많은 건 '세상에 이런 일이'에 1회로 나올 수 있는 대략 10분짜리 꼭지다. 10분짜리 꼭지에서 한 편의 영화가 되기까지 할머니의 공이 컸다. 할아버지도 소도 워낙에 말이 없다. 가끔 "안 팔아"라고 외치는 할아버지가 웃음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웃음소스는 할머니에게서 나왔다. 할머니의 혼잣말과 표정이 압권이었다. 할머니의 팔자타령은 극에서 가장 중요한 웃음코드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없었다면 무성영화가 되었을 듯.


워낭소리는 느릿느릿 하다. 감독이 촬영하며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을 때, 할아버지와 소가 너무 느려서 촬영하기 힘들었다는 점을 꼽았다. 소와 할아버지의 속도는 촬영팀도 힘들게 했지만 자칫하면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정도의 사람들은 현실의 초고속 문명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워낭소리의 속도를 늘어지는 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정말 '편집의 승리'다. 편집은 지루한 소재를 재밌는 이야기로, 안단테의 템포를 모데라토로 느끼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들이 편집을 말할 때 사실을 왜곡하는데 사용하거나 '발 편집'이라고 비난할 때 사용한다. 애초에 영상이 매끄럽다면 편집이 생각나지도 않았겠지. 워낭소리에서도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 약간의 편집이 들어갔음직한 부분이 보였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작정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 눈에나 보일 법한 장면들이었다. - 작정하고 영화를 본 내눈에는 몇 몇 장면이 작위적으로 보였다.



할아버지네 논과 밭은 청정지역이다. 기계를 쓰고 농약을 치는 옆 논과 대비되는 화면으로 할머니의 인상 쓰는 표정이 나왔지만, 할아버지네 논에 사는 우렁이와 각종 수중생물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할아버지는 소에게 먹일 꼴을 베기 위해 논밭에 농약을 안친다고 말한다. "소가 없으면 나도 죽어."라는 대사도 나온다. 소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동물과 주인이 아닌 자식과 부모 관계였다. 우스갯소리로 영식이[둘째 아들]보다 소가 나아,라고 하는데 어쩌면 일리 있는 말 일지도. 할아버지가 소를 팔러 우시장에 갔을 때 '이 소가 차가 오면 저절로 피해요.' '내가 자는 사이에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 놨어요.' 그러니까 5백만 원 아니면 안 팔아! 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 "할아버지 이 소는 질겨서 먹지도 못해요." 할아버지와 소 판매상들 간의 인식 차이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자신의 다리이며 일하는 농기구이며 자동차의 역할도 한다. 판매상들에게 소는 단지 먹기 위해 사육하는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소를 팔지 못한다.



소와 할아버지는 참 많이도 닮았다. 어렸을 때 침을 잘 못 맞아 힘줄이 오그라든 할아버지의 왼쪽 다리와 소의 비쩍 마른 몸. 지독할 정도로 우직한 성격. "거 힘들다고 안 하면 되겠는 겨?" 할아버지는 대사로 소는 눈빛으로 말한다. 소머리 클로즈업 장면에선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충혈된 할아버지와 소. '아파'를 연발하는 할아버지와 헥헥대는 소. 정말 많이 닮았다. 한 줄로 영화를 요약한다면 이 문구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사족


원래는 6개월을 잡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소가 3년을 살아서 촬영도 3년으로 길어졌댄다. 소가 10년을 더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웃음이 났다. 촬영을 마치고 공중파 3사와 (아마도)ebs에 판권을 팔려고 돌아다녔는데 팔리지 않아서 인디 영화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가 성공할 줄은 감독도 방송사도 관객도 몰랐을 거다. 우리나라에서 독립피디로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스레 현실이 아득해졌다. <개봉하기 전에 친구가 워낭소리 언론 시사에 초대해 줬는데 가지 않았다. 그저 그런 인디영화인 줄 알았다. 제목이 워낭소리라 판소리와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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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2009-03-0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여운이 남네요...벌써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좋은 영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