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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끝난 시간이 다음 회차였던 체인질링과 10분이나 겹쳐 허겁지겁 영화관을 가로질러 도착했다. 3시간이나 영화에 몰입했다가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음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조금은 걱정스러웠으나, 예매한 영화는 영화 시작 후에는 환불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서 그냥 뛰었다. 도착해보니 영화는 이미 시작해있었다. 보통의 나는 영화나 연극을 보기 전에 리뷰나 스포일러를 꼼꼼히 확인한다. 어떤 사람은 그게 공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고 말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으면 놓치게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재미를 조금 반감시키고 많은 부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룰은 내가 예매하거나 관심 있어 하는 공연에 한정된다. 남이 보여주는 공연은 사전 조사 없이 그냥 찾아가서 보고 돌아온다. 체인질링이 19세 관람가라는 사실은 입장하고 나서 자리를 찾기 위해 표를 살펴볼 때 알았다. 몰랐으면 좋으련만 알고 나니 은근히 긴장됐다. 요 근래에 본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쌍화점'이 유일한데 같이 본 이성분이 의식돼서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난다. 영화 트레일러 볼 땐 유괴관련 이야기처럼 보였는데 혹시 이것도?? 영화에 피가 나오든 신음소리가 나오든 탐탁지 않을 것만 같았다.
체인질링은 처음부터 후반부까지 계속 불편했다. 영화가 시작한 후 입장해서 앞부분을 놓친 것도 불편했고, 3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콜라를 마시고 2시간 30분을 더 앉아있으며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도 불편했다. 결정적으로 영화 상영 2시간 동안 머리에 핏대가 설 정도로 '불편'했다. 사실 마지막 불편함이 가장 컸다. 1920~30년 대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와 맞물린 경찰의 무능과 부패, 언제나 사이코 패스는 존재한다. 같은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머리 속에 파고 들어왔다.
영화의 가장 큰 뼈대는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 명제에 그 시대의 온갖 부조리들이 나타난다. 트레일러만 보고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담은 영화겠거니 생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1차 대전 종전 후 남성 우월주의를 업은 공권력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거의 1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뤄온 것처럼 보이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경찰의 부패지수나 권력 남용이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다른 아이를 찾아온 경찰이 실수한 게 아니었던 건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와 짜고 월터인 척 연기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린 아이가 그 정도로 강력하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은, 나는 어려서 소년원에 안가요-라고 당돌하게 외치던 꼬마를 보며 추측하건데 노숙자로 떠돌던 아이에게 따뜻한 집과 먹을거리가 생긴다고 유혹했기 때문일 듯. 이러한 사실 말고도 나중에 드러나는 정황 증거들은 데려온 아이가 월터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실이 뻔 한데도 반장은 자기가 꾸민 연극을 사실이라 주장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한 거짓말을 실제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닌 프레임이다. 반장에게 '저 아이는 반드시 월터여야만 한다'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고, 프레임의 효과는 실로 위대한 것이어서 아이를 찾아 달라 애걸하는 엄마를 면박주고, 무시하고, 미친 사람 취급하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한다. 반장은 LAPD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지적 소아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권력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반발은 곧 경찰 전체에 대한 반발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정신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 현장은 당시 여자들의 지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찰에 대항하는 여자는 무조건 코드 12 정신병원 행. 국가는 맘만 먹으면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 2009년 2월 17일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 병원 안에서 동조했던 간호사들과 의사도 눈에 띄었다. 나치 정권 시절 유태인을 가스실에 집어넣었던 대다수는 나치당의 열혈 당원들이 아니고 독일에서 예비군으로 소집된 평범한 아저씨들 이었다지? 뚜렷한 주관이 없는 개인들은 자신이 의료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경찰의 무능함이 두드러진다고 하기엔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경찰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건 윗대가리들이었지 경찰 조직 전체는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나 현명한 사람들은 있다.
그 시절에도 사이코 패스는 있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강호순은 사회에 불만이 전혀 없고 본인의 현재 생활에도 만족하고 있었다고 했다. 신문에서는 다른 묻지마 살인마들과는 다른 유형의 전형적인 서구형 사이코 패쓰가 등장했다고 떠들었다. 그래 딱 그 범인이 서구형 싸.패의 전형이었다. 그냥 아이들을 잡아다가 그냥 죽였다. 도끼로 아이들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나중에 범인의 조카로 나온 아이가 자백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되서 숨이 막혔다. 고백하던 순간이 불편함의 절정이었다.
절정이 끝나고 20분가량의 통쾌한 결말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결말이었다. 살인마 사형, 시장 재선 출마 포기, 청장 사퇴, 반장 영구 정직, 정신병원에 감금된 코드 12 여성들 석방. 가장 큰 문제 하나만을 남겨두고 꼬여있던 문제들이 줄줄이 해결되었다. 영화가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영화 마지막 부분을 보고서야 알았다. 실제로 아이를 찾지 못했고, 영화에서도 아이는 찾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닌 허구였다면 이런 식으로 결말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동의 쓰나미가 몰아치게 5년 후에 나타나는 아이가 월터와 함께 갇혀있었던 아이가 아닌 월터였겠지. 그래도 밝게 웃으며 '희망'을 얻었다는 졸리의 미소에서 나도 희망을 얻었다.
기타.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곧바로 눈에 띈 건 졸리의 새빨간 입술. 이미 시작한 영화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와중에 새빨간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촌스러운 빨간색으로 칠해놔도 섹시-했다. 20세기 초 여성들은 모두 입술을 저렇게 칠하고 다녔을까. 내 기억 창고에 다른 등장인물의 입술색깔은 전혀 없는 걸 봐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나이스! 정말 예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