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즈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짤막하게 정의론에 대한 리뷰를 올렸었는데, 시리즈 형식으로 롤즈의 정의론의 1부 원리론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단 '정의의 역할과 정의의 주제'를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주제로 살펴보고 다음에 고전적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한 비판내용을 살펴보고 원초적 입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볼 예정이다.

1.공정으로서의 정의(the justice as fairness)

 원초적 입장의 논의로 진입하기 전에, 그 예비 단계라 할 수 있는‘공정으로서의 정의(jutise as fairness)’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공정으로서의 정의’는 롤즈가 절차적 공정성을 핵심으로 정의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사회에 필요한 어떤 원칙들이 필요함을 알고 있고 선택한 원칙들을 지킨다고 가정한 후, 이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선택된 정의관은 공정한 것이며 그래서 잘 질서지우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관한 논의를 통하여 원초적 입장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즉 어떤 집단내의 사람들이 절차적 공정성을 보증해주는 세밀하고도 상식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러한 조건을 토대로 선택된 원칙들이 정의의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원초적 입장의 가상적 상황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원초적 입장을 논의하기 위한 토대 혹은 예비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롤즈가 해명하려는 제일의 과제는 계약적 합의에 따른 절차적 공정성을 해명하고 그것의 구체화된 형태인 원초적 입장을 통하여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의의 역할과 정의의 주제등의 논의가 포함된다. 정의의 역할이 무엇인지, 롤즈가 다루려고 하는 정의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출발로 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논의는 시작되며, 또한 이를 통하여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의미가 보다 더 분명히 제시되는 것이다.

1-1.정의의 역할(the role of justice)과 정의의 주제(the subject of justice)
1-1-1.정의의 역할
 롤즈가‘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검토함으로써 정의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다.

 롤즈에 의하면, ‘사회란, 그 성원 상호간에 구속력을 갖는 어떤 행동 규칙을 인정하고 대부분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느 정도 자족적인 조직체’이다.(37쪽) 그러나 사회는 상호간의 이익을 위한 협동체이지만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해관계의 상충을 조정하는 어떤 원칙들의 체계가 요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정의의 원칙이다. 이 사회정의의 원칙은 ‘기본적인 사회제도 내에서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을 제시해주며, 사회협동체의 이득과 부담의 적절한 분배’를 결정해주는 것이다.(37쪽) 그래서 지향해야 할 사회는 그 성원들의 선을 증진해주고, 공공적 정의관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이다. 롤즈는 그러한 사회를‘질서정연한 사회(well-ordered:잘 질서 지워진 사회)’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회는 (1)첫째, 다른 사람도 모두 동일한 정의의 원칙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고, (2)둘째, 사회의 기본제도가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그 사실 또한 널리 주지되어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 이러한 경우 각각의 요구를 판정하게 될 공동을 입장을 인정하게 되는데, 이것이‘공공적인 정의감(public sense of justice)’이다.

 롤즈에 의하면,  이러한 공공적인 정의감은 사회구성원들의 굳건한 결합을 가능하게 해주고 각자 서로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진 개인들 간의 유대를 공공히 해주며, 다른 목적들의 추구에 한계를 정해준다. 그래서 이러한 공공적인 정의관이 공동체의 기본헌장을 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치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들은 각각의 나름의 정의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로부터 사람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어떤 사회정의의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사회 협동체의 이득과 부담에 대한 적절한 분배를 정해줄 어떤 특정한 원칙들의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주장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38쪽) 이로부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각각의 다양한 정의관들과 구별되면서 상이한 원칙과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역할을 나타내주는 정의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즉, 다양한 집단들 내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일치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정의관들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정의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관계의 상충을 조절하고 보다 많은 선을 증진시켜줄 어떤 체계들의 원칙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정의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역할을 나타내는 정의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역할은 사람들이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것에서 합당한 것에 대한 판단하고 이득을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적합한 것인가를 나름대로 판단하게 하고 명시하게 해주는 것이다.

1-1-2.정의의 주제
 정의의 문제는 다양한 곳에서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법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든가, 서울시의 교통체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불리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든가하는 것들은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즉, 정의의 문제는 법, 제도, 사회체제뿐만이 아니라 의사결정, 판단, 비판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들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롤즈가 논의하려는 것은‘사회정의(social justice)’이며 일차적 주제는‘사회의 기본구조(basic structure of society)’이다. 그것은‘사회의 주요제도가 권리와 의무를 분배하고 사회협동체로부터 생긴 이익의 분배를 정하는 방식’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0쪽) 이 지점에서 롤즈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조절하는 것으로서 사회정의의 원칙이 갖는 핵심적 역할을 제기한다. 롤즈는 ‘직감적으로’생각하건데, 사회의 기본구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지위가 속해있고, 서로 다른 지위로 태어난 사람들은 정치제제, 경제적.사회적 여건들에 의해서 상이한 기대를 갖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위를 갖고 태어나고, 또한 각각의 천부적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것을 자연적인 것으로만 둘 경우에는 불평등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정의의 원칙이 가장 먼저 적용되어야 할 부분은 이와 같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원칙에 따라 잘 조절되고 규제되느냐가 사회체제의 정의 여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체제의 정의 여부는 ‘본질적으로 권리와 의무가 할당되는 방식에 달려있으며 사회의 여러 방면에 있어서 경제적 기회와 사회적 조건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41쪽)

 그래서 롤즈의 과제는 이러한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평등의 우선성 아래에서 권리와 의무가 할당되는 방식과 기회의 평등을 적합하게 부여하는 사회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것이다. 롤즈는 이러한 사회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범위를 두 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첫째, 특수한 경우의 정의만을 문제 삼고 있다. 즉 제도나 사회체제 일반의 정의를 문제 삼거나 국제법이나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정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롤즈가 해명하려 하는 제일의 과제는 계약적 합의에 따른 절차적 공정성을 해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제도나 사회체제일반의 정의를 문제 삼으면 그 해명이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해지기 때문에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난점이 발생한다. 그래서 롤즈는‘다른 사회와 분리되어 폐쇄 체제로 생각되는 사회의 기본구조에 합당한 정의관’을 정식화 하는 것으로 한정한다.(41쪽) 그래서 롤즈가 해명하려하는 절차적 공정성에 입각한 정의의 원칙은 소규모 공동체나 집단의 규칙과 규범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둘째, 질서정연한 사회를 규제하는 정의의 원칙을 검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롤즈는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게 해동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것인지를 제기한다. 그것은‘부분적인 준수론(partial compliance theory)’이 아니라‘철저한 준수론(strict compliance theory)’에 입각한 것이다. 부분적 준수론은 부정의를 처리하게 될 방법을 구제하는 원칙들을 연구하는 것임에 반하여 철저한 준수론은 완전히 정의로울 수 있는 사회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일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지만, 롤즈가 철저한 준수론에 입각하는 이유는 철저한 준수론은‘긴요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기초를 제시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쪽)

 지금까지 정의의 주제와 정의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롤즈가 정의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의 개념은‘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사회적 이득의 절적한 분배를 규정할 정의의 원칙들이 갖는 역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44쪽) 또한 이를 통하여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사회의 기본구조에 대한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합의의 대상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자신의 이익증진에 관심을 가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평등한 최초의 입장에서 그들 조직체의 기본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 채택하게 될 원칙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원칙들은 그 후의 모든 합의를 규제하는 것으로서, 참여하게 될 사회협동체의 종류와 설립할 정부형태를 명시해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롤즈는 정의의 원칙들을 이렇게 보는 방식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부른다. 이제 롤즈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의 한계를 공정으로서의 정의와의 비교를 통해서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직관주의의 비판내용을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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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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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지난 일이지만,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하여 법원은 부분삭제 판정을 내렸다. 결국 그래서 앞부분은 꺼멓게(?) 영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고인(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법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몇년 전, 이 문제는 mbc 100분 토론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규제의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와 규제의 충돌을 조절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해도 누가 판단할 것인가?등등 표현의 자유와 규제의 문제는 계속 충돌하는 문제이고,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주제이지만, 아마 해결보지는 못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장미의 이름은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는 아니다. 또한 특별히 정치적인 해석을 강하게 시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는 박정희가 엔카를 부르고 경호실장인 차지철의 팬티차림 모습, 중앙정보부장의 어영부영한 모습등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코믹함은 기존의 코믹영화와는 다르다. 코믹한 장면으로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보통의 코믹영화와는 다르다. 냉소가 첨가된 잔잔한 분위기에서 영화의 장면은 계속된다. 긴장감을 가지면서도 코믹한 장면은 계속 연출된다. 소위 이런 종류를 두고‘블랙코미디’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인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가처분 소송을 당하고 부분삭제 판정을 법원으로부터 받았다. 블랙코미디의 영화가 법원에 의해 부분삭제를 받는 상황은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내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의 미스테리로 전개된다. 살인사건을 밝혀내려는 자인‘윌리엄 수도사’와 살인을 저지른자라 할 수 있는‘호르헤 수도사’가 등장인물의 두 축으로 자리 잡는다. 윌리엄 수도사는 실험과 관찰을 중요시한 철학자 베이컨을 스승이라 자부하는 근세적 특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중세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중세적 특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부(실제로 시학 2부는 있었다는 추측이 있을 뿐 현재에는 없다.)에 독약을 발라놓는다. 그래서 시학 2부를 읽는 수도사들은 손에 침을 발라 시학 2부의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독약을 먹고 죽어 나간다. 그리고 윌리엄 수도사는 이것을 밝혀낸다.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왜 호르헤 수도사는 독약을 발라서 시학 2부를 읽는 수도사들을 죽게 만들었는가의 이유이다. 결국 그것은‘웃음’의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인간의 특징으로 삼고 희극은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준다고 웃음을 긍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르헤 수도사는‘웃음’은 인간의 두려움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신의 존재는 위협받고 그래서 시학 2부에 독약을 발라놓았던 것이다. 웃음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 없어도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실험과 관찰을 통한 방법으로)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신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를 지탱해온 종교적 전통과 문화는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호하기 위한 호르헤 수도사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까? 그가 처한 시대적 조건을 이해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르헤 수도사 자신의 기득권과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서적을 감추고 읽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정당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믿음만을 고수하고 진리에 이르는 또 하나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때 그 사람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으로 들어가보자! 이 영화는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부분삭제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 때 그 사람들>이 지니는 코미디의 성격을 제기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나오는 코미디에 대한 내용을 보자.

“<코미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코마이>, 즉 <시골 마을>이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흥겨운 여흥이었던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이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었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준 서사시보다, 비극보가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하, 이윤기 역, 열린책들 1993, 734쪽)

 '코마이' 즉 코미디는 단지 가벼운 성격을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비록 거짓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 좀 더 성찰의 기회와 앎의 길을 제공해주는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의 자유와 감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성과 진실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블랙코미디의 성격의 영화<그 때 그 사람들>에서 보여주는 희화화와 풍자의 장면은 관객들에게 과거에 대한 반성과 진실의 길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분삭제 판정은? 그것은 법원이 판단할 일은 아니다. 물론 규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영화비평가 및 영화감상자들을 통해서 그 영화에 대하여 판단하고 여론이 형성되는 가운데야 비로소 진행될 수 있는 것이지, 기관이 통제하는 것은 반성과 비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호르헤 수도사가 웃음의 문제를 통제했던 것은 하나의 독단이요 파시스트적 행위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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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08-07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약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셔서 신선했습니다.

꼬마 2007-08-08 15: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알라딘에 서평을 써본지 얼마안됐는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평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벤트가 있기도 해서, 장미의 이름은 새 판본으로 다시 샀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요...
 
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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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에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가 하고 의문을 던졌는데, 그것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와 관련이 있다. 물론 에코가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한 것 같은데,(이것은 나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다.) 일단은 소설속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는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읽은지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보르헤스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와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를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보르헤스의 '골렘'이라는 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골렘'은 원래 구스타브 메이링크의 소설이다. 이것을 보르헤스가 독일어로 처음 읽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프라하의 랍비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보르헤스는 한동안 유대 신비주의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고 하는데, 그 때(보르헤스가 60세 되던 1959년)에 쓴 시가 '골렘'이다. 그 시의 내용을 일부만 살펴보면,

만일 (플라톤이 <크라틸로>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이 사물의 원형이라면

'장미'말 속에 장미가 있고

나일강 전체가 '나일'속에 있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두려운 이름도 있을 것이다.

신의 암호를 담고

전지전능한 힘을 글자 속에 간직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늘의 별들은

그 말을 알았다.(카발라에 의하면)

원죄의 녹으로 그말은 지워져 버리고

자손들은 잊고 말았다

인간의 궁리와 고지식함은 끝이 없다. 어느 유대 마을에서 한 무리의 선민들이

그 이름을 찾아 긴 밤을 지새우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보르헤스 문학전기>, 김홍근 지음, 솔 출판사 122쪽)

  인간의 궁리와 고지식함에 대한 비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호르헤 수도사가 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웃어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만들어낸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는 없을까?  호르헤 수도사와 보르헤스와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미 호르헤라는 이름은 보르헤스의 것이고, 또한  보르헤스도 나중에 장님이 되었는데, 호르헤 수도사도 장님으로 나오고, 보르헤스의 백과사전식 지식은 수도원의 도서관으로서 비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창작물은 열린작품으로서 작자는 그에 대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와 생각은 독자들에게 맡겨져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한 보르헤스의 '골렘'시와 호르헤 수도사의 소설속 특징은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보르헤스를 참조삼아 단지 소설속 특징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름'과 관련된 기호학적인 어떤 내용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들지만, 나는 기호학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것도 두고 볼일이다. 호르헤 수도사와 윌리엄 수도사 이 둘간의 긴장된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자는 누구인가? 생각해 볼일이다.
 
이에 대한 2차 텍스트가 우리나라에는 강유원님이 쓴 <장미의 이름 읽기>하나 밖에 없는데, 소설이 재밌었다면, 재미를 넘어 뭔가 호기심이 발동했다면, <장미의 이름 읽기>도 재밌을 것이다. 강유원님의 세미나 팀이 장미의 이름의 오역을 체크해서 출판사에 주었더니 이윤기님이 충격을 받고 다시 개역작업에 착수했다는 사실 혹은 소문은 잘알려진 다소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래도 내가 번역을 문제삼을 만한 능력은 아니지만, 특유의 문학적 표현은 잘살려(혹은 잘 창조)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은 든다. 몇 구절 몇 구절 기억에 남는 문체가 있으니 말이다.  

장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당연히 영화는 책의 풍부한 내용을 살리지 못하고 추리영화로 단순화시켜 버렸다. 그래도 케이블 tv에서 가끔 하는데, 기억을 되살려주어서 볼만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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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에 간략히 데카트의 생애와 철학의 제1원리를 적었는데, 이에 이어서 데카르트의 방법이라는 주제로 적어본다.

데카르트는 관습과 감각에 대하여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명제를 통하여 자신의 철학의 제1원리를 정초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보아도 이렇게 의심하는(생각하는) '나'가 있다는 것이요, 이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에서 철학의 제1원리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이를 통하여 사유하는 주체의 확실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을 토대로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에 따라서 참된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 데카르트의 방법을 <방법서설>과 <정신지도의 규칙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참고로 인용한 쪽수는 <방법서설>은 서광사번역본이고(최명관역), <정신지도의 규칙들>은 문예출판사번역본이다(이현복 역).)  먼저 저번에 마이리뷰에 적어놓았던, 철학의 제1원리에 이어서 데카르트의 학문관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학문관으로부터 어떠한 진리탐구의 방법이 전개되는지를 명증성->분해->합성(연역)->열거(매거)의 순서로 살펴보겠다.

1. 데카르트의 ‘철학의 제1원리’(기초)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관습과 선례’였기 때문이다.(『방법서설』,19쪽 ) 관습과 선례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참된 것으로 간주되는데, 관습과 선례 같은 사실들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참된 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감각하지 못한 것이 꿈속에서 감각되고, 상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들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동안 자신이 받아들였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의 힘으로 진리를 찾아가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혼자서 찾아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이유를 제작품과 건축물, 도시건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한사람의 제작품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 것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이고, 건축물과 도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사람이 무계획적으로 고치고 변화시켜서 사용하는 것보다 한사람이 구상하여 지은 것이 더 아름답고 더 정돈 되어 있다는 것이다.『방법서설』, 16쪽 참조)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는 계속적인 회의 과정에서 이렇게 ‘의심하는 나’가, ‘생각하는 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철학의 제1원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이 명제의 의미에 관한 풍부한 논의들은 안쏘니 케니의『데카르트의 철학』제 3장 참조) 철학의 제1원리를 바탕으로 정신의 사용을 통하여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아주 판명하게 마음속에 품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참되다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방법서설』31쪽) 

2. 데카르트의 방법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데카르트에게서 ‘양식’,‘좋은 정신’,‘이성’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ㆍ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이현복 역(문예출판사 2001),<이하『규칙들』>, 243쪽 주해 참조) 그러나 그 동안은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구별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규칙1>에서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 견고하고 참된 판단을 내리도록 정신을 지도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라고 하였다. (『규칙들』, 15쪽)

2-1학문관

  “모든 학문은 인간의 지혜에 다름 아니고, 지혜가 비록 상이한 대상에 적용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빛이 여러 다양한 대상들을 비춘다고 해서 그 빛이 다른 것이 아니듯이 학문들도 서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학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따로 분리해서 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함께 탐구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학문을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학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규칙들』, 16-18쪽 )

 학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의 고리들을 차근차근 발견해가면서 통일성을 이루어야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며 방법이다. 학문의 연쇄성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문을 연쇄적으로 밝혀감에 따라 세계에 대한 파악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학문의 통일성에 기초하여 방법의 여러 가지 규칙들이 제시된다. 방법의 규칙들의 큰 핵심은 명석. 판명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할 것과, 분해(단순화), 직관과 연역을 통한 종합(확장), 확실성의 확인으로서의 매거(열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2명증성

“첫째로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안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방법서설』, 20쪽)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명증된 것,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만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산술과 기하학인데, 산술과 기하학은 경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하고 단순한 대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술과 기하학만이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방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공허해 진다. 그래서 산술과 기하학의 단순하고 순수하며 합리적인 연역이 모든 주제에 대하여 진리가 발견될 수 있도록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3분해

“둘째로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방법서설』, 20쪽)

 일상에서 사람들은 간혹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는 갑자기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생기는가 하면, 심지어 학교에서도 과제와 발표, 시험들이 겹쳐지면서 난감해지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머릿속에서의 혼란들이 불어 닥치기도 한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을 두고 주위에서는 일단 쉬운 일부터 처리하고 해결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해’라고 넌지시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다보면, 계획을 세우고 쉬운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각이 복잡해 질 때는 마음 편히 먹고 단순해질 때 한결 나아진다는 삶의 지혜를 갖고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의 단순화 규칙은 이와 유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순서를 무시하고 어려운 문제만을 검토하고 있는 사람들은 ‘건물 밑에서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마련된 사다리를 무시하거나 생각지도 않은 채로 한 번에 올라가는 사람의 행동과 비슷하다’고 비판한다. (『규칙들』, 39쪽) 복잡한 것에서 분리하는 단순화로부터 직관과 연역을 통하여 다른 것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직관이란, ‘순수하고 주의를 집중하는 정신의 단순하고 판명한 파악’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이 직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직관은 그 자체로 확실하고 명증적인 것이다. 하지만, 직관을 통해서만 참된 진리를 찾는다면, 단편적인 진리만을 찾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곧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방법의 목적은 학문은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학문을 총체적이면서 통일적으로 밝혀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과 함께 연역과 열거를 제시한다. (여기서의 직관은 칸트에게서의 직관과는 다르다. 데카르트에게서 직관이 '정신의 단순하고 판명한 파악', 즉 주의를 집중해서-직각적으로, 혹은 즉각적으로-파악하는 것이라면, 칸트에게서는 대상과 매개없이 직접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직관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이다.)  

2-4합성(연역)

“셋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간에도 순서가 있는 듯이 단정하게 나아갈 것”(『방법서설』, 20쪽)

 연역은 직관을 통하여 얻은 참된 진리를 가지고 순서에 맞게 계열화 하면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연역이 가능한 이유는 ‘그 자체로 명증적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직관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사례)1

직관: 나는 존재한다.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등

연역:

3, 6, 12, 24, ? ?는  각의 수들이 배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48임을 알 수 있다. 

3, x, 12x 6

3, x, y, 24는→x6, y 12

3, x, y, z 48→x 6, y12, z24

①이 제일 찾기 쉽다. 그래서 순서에 맞게 계열화해야 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고찰되는 것이다.

②③④는 ①보다 찾기 어렵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고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②③④에도 찾는 어려움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얼핏 보면 ④가 제일 어려운 것 같지만, ③이 제일 어렵다. ④에서는 y라는 비례중항을 찾으면 x와 z를 다시 분리하여 3, x, 12 와 12, z, 48로서 더 단순화 할 수 있지만, ③은 ④보다 더 상이한 경우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규칙들』, 45-47쪽 참조) 그래서  ‘어떤 한 진리를 다른 진리에서 연역한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단순하고, 또 다른 것들이 이것에서 얼마나 더, 덜 혹은 같은 정도로 떨어져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 해야 한다.(『규칙들』, 39쪽 참조) 

 직관은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연역은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사유운동 속에서 참되게 인식되는 점에서 특성이 다르다. 그러나 방법적 원리를 토대로 한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사유운동을 통하여 인식능력이 향상되면 (간단한)연역은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사례)2

①1+3=4 

②2+2=4

③1+3=2+2

①과 ②는 각각 직관으로서 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역으로부터 ①과 ②가 ③이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사유 운동을 통해서 그 능력이 향상되면, ③도 직관처럼 참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③도 직관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①②③에 더 첨가 하는 사례도 제시할 수 있다.

①1+3=4 

②2+2=4

③1+3=2+2

④2×2=4

⑤8÷2=4

⑥1+3=2+2=2×2=8÷2

⑥은 ③보다 더 복잡하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정신의 능력이 향상 되어 있다면, ⑥도 직관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직관의 범위가 직관되는 단순 명제에서 직접 연역되는 대상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규칙들』, 248쪽 주해 참조) 또한 직관과 연역, 매거는 각각 특성은 다르지만,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사유운동 속에서 보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방법의 적용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5매거(열거)

“그리고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枚擧)와 전체에 걸친 통관(通觀)을 어디서나 행 할 것”(『방법서설』, 20쪽)

“지식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계획에 속하는 것은 지속적이고 면밀히 검사해야 하고, 충분하고 질서 잡힌 열거로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규칙들』, 48쪽)

위의 사례)1의 ④3, x, y, z 48→x 6, y12, z24에서 각각 y를 비례중앙으로서 12를 구했다면 각각 분리하여 xz를 구한 다음 열거하여 빠뜨린 것은 없는지, 전체적인 배열관계에 합당한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열거는 분산되어 있는 것을 추론하는 복잡한 연역의 일종이기도 하면서 확실성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3.마무리하며

 데카르트의 방법은 치밀하고 정확성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 2-1에서 보다시피, 이미 데카르트가 수학적 원리를 다른 학문에 적용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 철저함을 시도한 원리는 명증적인 것을 진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전제 한 후, 차근차근 계단을 밟듯이 확장, 상승되어 나간다. 소부분으로 나누는 단순화를 시도한 다음 이것을 다시 합성(연역)하고 열거로서 확인해간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의 원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중세와는 달리 이성에 대한 믿음 속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몇몇 단순 명제들을 직관적으로 통찰한 다음, 이것들로부터 어떤 것을 도출하려고 할 때 유익한 것은, 이 명제들을 지속적이고 단절되지 않은 사유운동으로 두루 살피고, 이것들 간의 상호 관계를 반성해보며, 가능한 한 동시에 많은 명제를 판명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식은 더욱 확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정신의 역량 또한 상당히 증대될 것이기 때문이다.”(『규칙들』,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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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트(50pcs-Tin) 책에 손상을 주지 않는 얇은 책갈피
미국
평점 :
절판


현재 4개째샀다. 처음에는 내가 포스트 잍을 많이 써서 대용으로 사용해 볼까 했는데, 그러기에는 다소 좀 불편하고 많이 써야 되서 지금은 표시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책갈피용으로 써도 무방하지만, 스터디나 세미나 할 때, 책 분량 표시용으로 아주 적당하다. 다음 세미나, 스터디 공부 분랭을 이것으로 살짝 표시해두면 헷갈리지 않는다. 공부하다가 교수님한테도 내 책에 꽂혀 있는게 4개 주었더니 아주 좋아하셨다.

특히 외국어본과 한글번역본을 같이 볼 때, 유용하다. 외국어 본에 표시해놓고, 한글본 읽어가면서 같이 비교하면은 편리하다.

부담없는 선물용으로도 좋다. 좀 비싼거나 고급스러운것 사기에는 주는 사람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때, 마음표시로 선물은 하면 서로 부담이 없어서 고마운 마음이 잘 느껴지는 것 같다. 어떤 강좌가 있었는데, 강좌 끝나고 교수님께 감사하다고 드렸다가 그날 교수님 넘 좋아하셔서 술 새벽까지 마셔야 했다.(ㅎㅎ) 그리고 후배 생일 선물 사주었더니, 워낙 이런 액세서리류 좋아하는 아이라 무지 아끼는 모습을 보았다.

난 2통째 사용중인데, 나머지도 마져 떨어져가서 곧 2~3개나 사놔야 겠다.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주고 싶을 때가 있으니 그때를 위해서 준비도 되고...

꼭 1통을 사주지 않더라도, 그냥 저냥 한 두개씩 주어도 사람들이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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