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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아래의 글에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가 하고 의문을 던졌는데, 그것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와 관련이 있다. 물론 에코가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한 것 같은데,(이것은 나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다.) 일단은 소설속에 등장하는 호르헤 수도사는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읽은지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보르헤스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와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를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보르헤스의 '골렘'이라는 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골렘'은 원래 구스타브 메이링크의 소설이다. 이것을 보르헤스가 독일어로 처음 읽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프라하의 랍비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보르헤스는 한동안 유대 신비주의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고 하는데, 그 때(보르헤스가 60세 되던 1959년)에 쓴 시가 '골렘'이다. 그 시의 내용을 일부만 살펴보면,
만일 (플라톤이 <크라틸로>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이 사물의 원형이라면
'장미'말 속에 장미가 있고
나일강 전체가 '나일'속에 있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두려운 이름도 있을 것이다.
신의 암호를 담고
전지전능한 힘을 글자 속에 간직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늘의 별들은
그 말을 알았다.(카발라에 의하면)
원죄의 녹으로 그말은 지워져 버리고
자손들은 잊고 말았다
인간의 궁리와 고지식함은 끝이 없다. 어느 유대 마을에서 한 무리의 선민들이
그 이름을 찾아 긴 밤을 지새우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보르헤스 문학전기>, 김홍근 지음, 솔 출판사 122쪽)
인간의 궁리와 고지식함에 대한 비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호르헤 수도사가 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웃어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만들어낸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는 없을까? 호르헤 수도사와 보르헤스와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미 호르헤라는 이름은 보르헤스의 것이고, 또한 보르헤스도 나중에 장님이 되었는데, 호르헤 수도사도 장님으로 나오고, 보르헤스의 백과사전식 지식은 수도원의 도서관으로서 비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창작물은 열린작품으로서 작자는 그에 대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논의와 생각은 독자들에게 맡겨져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한 보르헤스의 '골렘'시와 호르헤 수도사의 소설속 특징은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보르헤스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보르헤스를 참조삼아 단지 소설속 특징으로 형상화한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름'과 관련된 기호학적인 어떤 내용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들지만, 나는 기호학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것도 두고 볼일이다. 호르헤 수도사와 윌리엄 수도사 이 둘간의 긴장된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자는 누구인가? 생각해 볼일이다.
이에 대한 2차 텍스트가 우리나라에는 강유원님이 쓴 <장미의 이름 읽기>하나 밖에 없는데, 소설이 재밌었다면, 재미를 넘어 뭔가 호기심이 발동했다면, <장미의 이름 읽기>도 재밌을 것이다. 강유원님의 세미나 팀이 장미의 이름의 오역을 체크해서 출판사에 주었더니 이윤기님이 충격을 받고 다시 개역작업에 착수했다는 사실 혹은 소문은 잘알려진 다소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래도 내가 번역을 문제삼을 만한 능력은 아니지만, 특유의 문학적 표현은 잘살려(혹은 잘 창조)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은 든다. 몇 구절 몇 구절 기억에 남는 문체가 있으니 말이다.
장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당연히 영화는 책의 풍부한 내용을 살리지 못하고 추리영화로 단순화시켜 버렸다. 그래도 케이블 tv에서 가끔 하는데, 기억을 되살려주어서 볼만은 하다.